캔버스에 홀로 한 소녀가 서 있다. 사방이 가로막힌 채 주위는 잿빛으로 가득하다. 어둠 속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군인들이 총칼로 무장하고 섰다. 하지만 소녀는 두려움도 눈물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올해 초 이라크에선 정부가 주최한 신인 대상 미술대전이 열렸다. 군인 속 소녀를 그린 작품도 당시 출품작 가운데 하나.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8일 “이런 어두운 주제를 다룬 작품은 이라크 현대미술에선 전례가 없는 새로운 흐름”이라며 “젊은 예술가들이 조국의 고통과 아픔이 밴 ‘현실’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물론 이라크 미술이 과거 빈약했단 뜻은 아니다. 광적인 예술 애호가였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미술계를 후원했다. 지금도 당시가 더 풍요로웠다고 회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정부 통제가 강하다보니 획일화된 경향이 강했다. 정치와 관련 없는 풍경화나 정물화, 아니면 밝고 희망찬 미래를 그린 작품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2003년 이라크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예술가들은 포화를 피해 국외로 떠났다. 이 ‘공백의 시기’에 등장한 신세대들은 기존 관례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미술가 하림 카심 씨(34)는 “예전엔 교사나 선배들을 따라 ‘행복한 인생’만 그렸지만, 이젠 진짜 우리네 삶을 화폭에 담는다”고 말했다.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전쟁의 상처, 가난의 고통 등을 다룬 작품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카심 씨 역시 과거 금기시됐던 여성을 소재로 ‘이라크의 눈물’을 연작으로 그리고 있다. 바그다드예술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카나니 씨는 “학생들이 죽음이나 전쟁을 다룬 작품들만 너무 그려서 좀 밝은 주제도 다뤄보라고 권유할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라크 ‘예술의 봄’은 속단하기 이르다. 최근 촉망받던 신인작가 바심 샤키르 씨(24)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구걸하는 여성이나 전쟁고아를 사실적으로 그려 해외 평단에서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적 명성을 얻자 정부 관료들은 ‘이라크 비하’라며 못마땅해했다. 경찰이 그를 감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그는 조국을 등지고 시리아로 떠났다. 샤키르 씨는 “여전히 이라크엔 예술을 규제 아래 묶어두려는 세력이 있다”며 “바깥에서라도 진실을 담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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