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20분.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아메리칸 에어라인(AA) 77호기엔 승무원 6명과 승객 58명이 타고 있었다. 오전 8시 51분 비행기가 동부 켄터키 지역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워싱턴으로 향했다. 오사마 빈라덴의 지시를 받은 알카에다 조직원 5명이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펜타곤(국방부 청사)으로 돌진한 것이다. 비행기 승객과 펜타곤 직원 등 18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처참하게 무너진 펜타곤 건물 외벽은 1년 만에 복원됐다. 하지만 펜타곤은 그동안 건물 내부를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펜타곤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무참하게 뚫린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최근 리노베이션 공사를 끝낸 펜타곤은 28일 9·11테러 이후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취재진에 당시 파괴됐던 내부를 공개했다.
9·11테러 때 파괴된 건물은 펜타곤의 서남쪽 부분이다. 펜타곤의 5각형 건물을 10개로 나눴을 때 서남쪽의 4번과 5번 복도가 대부분 파손됐다. 전체 건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다. 건물 잔해만 5만 t에 이르렀다.
당시 파괴된 건물 1층에는 사무실 대신 희생자들을 기리는 채플과 추모의 복도가 만들어졌다. 미 국방부는 이곳에 사무실을 두지 않고 추모의 공간으로 재단장했다. 채플 입구에 들어서자 9·11 때 실종되거나 사망한 184명의 명단이 동상(銅像)으로 된 추모벽에 한 사람 한 사람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추모벽 바로 아래에는 이들의 사진과 활동상을 담은 책자가 놓여 있다.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추모의 벽 바로 왼편에는 당시 부상자들에게 수여한 ‘퍼플 메달’이 걸려 있다. 오른편에는 희생자들에게 바친 ‘자유의 메달’이 마주 보고 있다.
추모벽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이들을 기리는 애끊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하느님이 가족과 친구들을 축복하기를…’ ‘9·11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9·11테러 후 1년 뒤 세워진 이 채플에선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묵념과 명상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등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명상과 기도를 할 수 있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조그만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 줄에 10명씩 앉을 수 있도록 좌석을 배치했다. 모두 100명이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펜타곤 채플 목사인 케네스 윌리엄스 중령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펜타곤 직원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어떤 종교이든 상관없이 자주 찾아 기도와 묵상을 한다”고 말했다. ▼ 테러 흔적 지웠지만 마음의 상처는… ▼
채플 입구부터 시작해 100m가량 이어지는 ‘추모의 복도’에는 희생자 184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복도 벽에는 ‘9·11을 추도하며’라는 제목을 단 커다란 글씨 밑에 한 사람 한 사람 사진을 국화가 감싸며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고 있다.
복도엔 초등학생 고사리 손들의 작품이 줄 지어 전시돼 있다. 커다란 성조기와 함께 적십자사 깃발이 나부끼는 추모 작품이 복도 양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큰 글씨로 ‘성조기에 감사한다’는 문구도 눈에 띈다. 큐레이터인 앨버트 존스 씨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대부분 초등학생 작품들로 공간을 채웠다”고 말했다.
○ 테러 흔적 찾을 수 없는 외관
미 국방부는 9·11테러 후 하루빨리 건물을 복원하기 위해 3교대로 나눠 밤을 꼬박 새워 공사했다. 각 층마다 건물 외벽 옆으로 길게 늘어선 9개의 창문이 있는 4층짜리 건물에서 모두 36개의 창문이 교체됐다.
펜타곤 리노베이션 프로그램인 ‘피닉스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질 아흐메드 씨는 “건물 외벽을 기존의 것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인디애나 주에서 똑같은 재질의 대리석을 갖고 와 공사를 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폭파된 건물 현장 바로 앞에서 지켜봤을 때 이 건물이 손상됐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멀리서 펜타곤 건물을 보면 복원된 부분은 기존 건물보다 다소 밝은 색으로 나타난다. 펜타곤은 1994년 10월부터 시작된 내부 리노베이션 공사를 최근 끝냈다. 무려 17년 동안 진행된 이 공사는 9·11테러로 공사 일정이 변경되면서 내부를 완전히 뜯어 고쳤다. 총 45억 달러가 투입된 이 프로젝트는 9·11테러 후 ‘불사조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어 건물의 콘크리트 골조까지 다 드러낸 뒤 바닥에서 천장까지 모두 바꿨다. 펜타곤 메모리얼에서 만난 로버트 디치 펜타곤 공보담당 중령은 “9·11테러로 파괴된 펜타곤 건물 내부를 공개하기로 한 것은 9·11테러 10주년을 앞두고 당시 희생된 펜타곤 직원과 민간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 악몽과도 같았던 테러 현장
펜타곤 피습 당시 현장에서 건물 경비를 맡았던 아이잭 후피 상사는 지금도 당시의 악몽을 잊지 못했다. 후피 상사는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았다”며 “건물 안은 불이 타고 있었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화염 속은 살려달라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고 회고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처참한 시신을 등에 업고 나오기도 하고 시체를 질질 끌고 수습하기도 했다. 소방관이 위험하다며 비켜서라고 했지만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시 18명을 현장에서 구해냈다. 후피 상사는 “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당시 내가 구조했던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온다”며 “당시의 악몽을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 펜타곤 메모리얼엔 184명의 영령이
펜타곤 청사 서남쪽 희생자 184명의 영혼이 안치된 ‘펜타곤 메모리얼’은 이날도 추모객들의 발길로 붐볐다. 2006년 6월 15일 첫 삽을 떠 2008년 9월 11일 완공된 이 추모공원에는 당시 희생된 184명의 넋이 잠들어 있다. 추모공원은 사고 당시 가장 어린 대나 팔켄버그(당시 3세)부터 시작해 최고령인 존 얌니키(당시 71세)까지 나이순으로 추모공간이 배치돼 있다. 조그만 벤치 모양을 한 추모비 밑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바로 아래에는 물이 흐른다. 당시 숨진 펜타곤 직원 125명의 추모비는 펜타곤 건물을 향하고 있고 비행기 탑승자 59명의 추모비는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다. 미 국방부는 올해 9·11 1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성대한 추모식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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