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핫 피플]누온 체아… 헤르만 괴링… 전범들 궤변의 공통점

  • Array
  • 입력 2011년 7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누온 체아(왼쪽)와 헤르만 괴링
누온 체아(왼쪽)와 헤르만 괴링
지난달 2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외곽의 유엔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세기의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는 ‘킬링필드’의 핵심 전범 4명. 이들은 대학살과 반인류 범죄, 전쟁 범죄, 고문 및 살해 등 다양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크메르루주 정권에서 ‘브러더 넘버 2’로 통했던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85)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설파한 이론으로 캄보디아 전체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70만∼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심리가 시작된 지 30분도 안 돼 “공판이 불쾌하다”며 법정을 떠났다.

킬링필드는 1975∼1979년 폴 포트가 이끌던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대학살을 뜻한다. 급진 공산주의 성향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사회 개조를 명분으로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안경을 썼거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심지어 손이 하얀 사람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 누온 체아는 학살의 대상과 방법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지목받고 있다.

○ “재판부가 편파적이고 부당하다”

캄보디아의 영문 일간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따르면, 누온 체아는 이날 열린 재판에서 자신이 신청한 증인들을 재판부가 채택하지 않았고 법원의 조사가 처음부터 편견을 갖고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글라스와 검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수갑도 차지 않은 채 “변호인단이 상황을 설명해줄 것”이라는 짧은 말 몇 마디로 퇴정 이유를 밝혔을 뿐이었다.

누온 체아의 변론에 나선 미시엘 페스트만 변호사는 “법원 조사의 유일한 목적은 의뢰인인 누온 체아에 대한 불리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었고, 기소 내용과 달리 크메르루주 정권에서 그가 좀 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모든 증거를 재판부가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또 변호인은 “의뢰인은 자신의 반론이 받아들여지고 자신이 신청한 증인들이 출석할 때까지 공판에 나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누온 체아에게 반성의 기미는 없었다.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헤르만 괴링

누온 체아가 재판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재판(독일 전범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었음)에 섰던 헤르만 괴링의 그것과 겹쳐진다. 훈장이 뜯겨져 나간 나치제복 차림의 그는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재판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2인자로 비밀경찰(게슈타포)을 조직했고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승자들이 정의라고 포장해 꾸미는 각본’이라고 여겼다. 그는 “우리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법정에 서야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을 인터뷰했던 미군 소속 정신과 의사 리언 골든슨에게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는 나의 기사도 원칙에 위배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여성을 존중하며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말살 문제에서 내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점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기 자신을 열정적으로 변호했고 실제로 재판 초기에는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괴링은 법정에서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웃기기도 했으며, 검찰의 기소 내용 중 허점이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유대인들과 전쟁 포로들을 살해하라는 그가 직접 사인한 명령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형 집행 몇 시간 전 미리 숨겨놓았던 청산가리를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끝까지 비겁했던 그의 최후였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