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마리 아르틴센·20·여·오슬로대)
섬은 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웠다. 24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택시를 타고 서북쪽으로 달리기를 40분. 왼편에 아주 작은 섬이 나타났다. 우퇴위아 섬. 육지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이 섬에서 한 극우 민족주의자의 무차별 총격으로 86명의 꽃 같은 목숨이 사라져 갔다. 대부분은 10대 청소년이었다. 이에 앞서 범인은 오슬로 시내에서 정부청사를 겨냥한 시한폭탄을 자동차에 실어 터뜨려 최소 7명을 숨지게 했다.
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차 폭발로 191명이 사망한 뒤 서유럽에서 발생한 최대 테러다. 노르웨이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참사가 처음이라고 했다.
유가족들은 우퇴위아 섬에서 10분 거리의 순볼렌 호텔에 모여 있었다.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호텔 출입구 곳곳을 경찰이 막고 있었다. 한 주민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다”고 말했다. 한 경찰관은 “아직도 실종자가 남아 있어 섬 주변을 계속 수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잠수정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4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했다. 섬으로 향하는 선착장 입구는 진입로 주변에 경찰차 10여 대가 지키는 가운데 입구에서부터 경찰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섬에서의 총기 난사보다 1시간 반 정도 앞서 차량 폭탄테러가 벌어졌던 오슬로 시내 정부청사 인근은 더 삼엄한 분위기다. ▼ 체포된 브레이비크 “잔혹했지만 범죄 아니다” ▼
무장한 군인들은 청사로 향하는 모든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을 막았다. 시내 중심부는 경찰의 소개령이 내려졌으며, 도심 주요 지점에는 추가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군 병력이 배치됐다.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였던 오슬로는 사건 발생 하루가 지났지만 또 다른 공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가시지 않고 있다. 폭발 직후 정부청사 부근은 먼지와 연기가 자욱해 9·11테러 직후 미국 뉴욕을 연상시켰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이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동키르켄 성당 앞. 테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촛불과 꽃, 국기 수백 개가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소년소녀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200여 명이 바닥에 앉거나 둘러서서 꽃다발과 촛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많았다. 추모 행렬은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새벽에도 그치지 않았다. 대학생 룬트발렌 씨는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너무 충격적이다. 그리고 범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섬에서 청소년 학살을 저지른 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범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는 23일 변호인을 통해 자신의 폭탄테러 및 총기 난사를 인정한 뒤 “잔혹했지만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범죄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건을 일으키기 6일 전 개설한 트위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 좇는 10만 명의 힘과 맞먹는다.”(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한 인간의 잘못된 신념과 광기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