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11시 20분 코스피가 무려 184포인트나 떨어진 시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자산운용의 주식운용본부. “어… 어…”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더니 삽시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니터에 표시된 전 종목에 일제히 파란불이 들어왔다. 한참 만에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열흘만 떨어지면 코스피가 제로가 되겠어”라는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이 계속됐다.
하지만 채권파트의 표정은 달랐다. “5-3(5년 만기 국고채 3회차분이라는 뜻) 40억 나왔어요.” “좋은 정보. ○○기업 오늘로 바겐세일 마지막입니다. 내일부터 절대 이렇게 안 나온답니다.” “여기도 ‘사자’ 있어요.” “팔아요.” 대우증권 트레이딩센터의 채권거래 담당자들은 하루 종일 매매 주문을 넣느라 바빴다. 트레이딩센터의 주식 트레이더들은 모니터를 보면서 넋을 잃고 있었지만, 채권 트레이더들 사이에는 간간이 웃음도 터져 나왔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의 두 표정은 최근 혼돈을 겪는 국내 금융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국인은 증시에서 최근 6거래일 동안 3조2517억 원을 순매도하며 주가 대폭락을 불러왔지만 한국 채권은 같은 기간 2조3726억 원어치를 사들이는 대조적인 매매 패턴을 구사했다.
증권가에서는 “외국인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한국 채권을 팔지 않고 있다”며 “한국 경제의 장기 펀더멘털에 대해 비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외국인들이 주식을 판 돈을 달러로 바꿔 한국을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거나 한국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그 덕분에 원-달러 환율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상승폭이 크지 않다. 주가 폭락 양상과 비교하면 환율은 사실상 별로 오르지도 않았다.
외국인의 채권 순매수세 덕분에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최근 1주일 새 오히려 0.3% 내렸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주가폭락에도 매매거래 활발한 채권시장
주가가 이틀 연속 장중 100포인트 넘게 떨어진 9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금융시장이 열리기 전부터 대우증권 트레이딩센터와 KB자산운용의 주식운용본부를 찾아 공포와 긴장이 오가는 트레이딩 현장을 지켰다.
대우증권 트레이딩센터는 주식, 채권, 파생상품 전문 트레이더 200여 명이 국내 최대인 10조 원의 고객 및 회사 고유자산을
운용하는 곳이다.
주가가 장중 한때 184포인트나 떨어지면서 공포에 짓눌린 주식파트와 달리 건너편에 자리한
채권파트는 활기를 띠었다. “10-3(국고채 10년물 3회차라는 뜻) 팔아주세요.” “팔아달라는데…브로커야.” “기관인데 사자야,
사자.” 코스피가 1,800을 지나 1,700까지 차례로 뚫고 아래로 내려갔지만 채권 담당 트레이더들은 하루 종일 “판다”
“산다” “호가를 불러라” 등을 외치느라 분주했다.
주식가격이 빠질수록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인 채권에 수요가 몰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때 주식과 채권을 모두 내던지며 환율을 끌어올렸던 외국인들이 이번 위기에는 채권을
사들이고 있다. 외국인의 국고채 순매수 액수는 4일 1342억 원, 5일 2766억 원, 8일 7267억 원, 9일 7200억
원으로 증가세였다. 그 덕분에 환율은 1090원대로 뛰어오르지 않았고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날보다 0.12%포인트
떨어졌다(채권값은 상승). 한 채권담당 직원은 “주가가 급락하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채권 트레이딩룸의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모습에 가깝다”며 “이럴 때일수록 채권이라도 잘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주가가 오후 들어 1,800대를
회복해도 채권담당 직원들의 모니터에는 매수나 매도주문을 알리는 메신저가 수시로 깜빡깜빡 켜졌다. 코스피가 상승하면서 국고채 금리는
잠깐 상승세를 타기도 했다. 한 채권 트레이더는 “한국 채권 수요가 괜찮은 것은 제로금리에 가까운 선진국 채권에 비해 금리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재정건전성과 외화 유동성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 이틀째 대폭락 이어진 주식시장
대우증권의 주식 트레이더 중 일부는 장이 열리기 전에는 “국제 경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수 위주 ‘방어주’에 투자해 어떻게든
수익을 노려보겠다”며 의욕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오전 9시 개장하자마자 각종 그래프가 고꾸라지면서 하나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취재 때문에 트레이딩센터를 오가던 기자에게 한 트레이더는 “말도 붙이지 말고 발소리도 죽여 달라”고
요청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황이었다. 오전 10시 1,779 선으로 떨어진 코스피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 상급자가
“대응 방안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한 직원은 “사실상 방법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파생상품 트레이더는
“어제는 그래도 장 초반엔 버텨줬는데 이건 열리자마자 마구 빠지면서 감당이 안 된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전날 점심시간에 폭탄 터지듯 주가가 자유낙하했던 상황과 달리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주가는 상승 반전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김밥, 떡볶이, 샌드위치를 사 두고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던 KB자산운용본부에서는 오후 1시 10분을 지나면서 코스피가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자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손길이 하나둘씩 늘었다. 오전 중 3000억 원대 순매수하던 연기금이 4000억 원,
5000억 원으로 지속적으로 증시매입 자금을 늘리는 게 확인됐다. 1,684포인트까지 폭락했던 코스피가 장중 1,800 선을
넘어서자 그제야 펀드매니저끼리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KT&G 주가가 소폭 오른 것에 대해 “주가 폭락으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KT&G 주가만 오르는 거 아니냐”는 대화가 오갔다. 매니저들은 “우리 애들(보유 중인 주식) 밥 좀
주자”며 투자하는 업종, 섹터별 추가매수 종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장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송성엽 주식운용본부장은
“머리가 아파 죽겠다”고 했다. 그는 “이럴 때는 예리한 의사결정을 하기가 참 힘들다”며 “회의를 해도 딱히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서로 한숨만 쉬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날 밤 미국 상황에 주목하라고 했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내놓을 미국의 대응법과 미국 증시의 소화력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가 10일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송 본부장은 “만약 여기서 더 떨어진다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매니저는 “지난 일주일이 일년 같다”고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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