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폭동 희생 청년 ‘화합의 밀알’로 묻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이슬람식 장례식에 기독교 -유대교인도 참석
언론 “英사회 변화 계기될것”

“이들의 죽음을 이용한 그 어떤 보복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윤리적이지도 않고 이슬람 정신에도 맞지 않습니다.”

18일 오후 영국 버밍엄 서머필드 공원. 폭동이 한창일 때 이 도시에서 숨진 이슬람교도 청년들을 위한 장례 기도회가 거행됐다. 영국 무슬림 사회에서 존경받는 학자인 셰이크 알리 야쿠비 씨는 연설을 통해 “주민들을 지키다가 희생된 이 청년들은 이슬람교가 무엇인지, 무슬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줬다”고 힘주어 말했다.

파키스탄계인 하룬 자한(21), 샤자드 알리(30), 압둘 무사비르 씨(31)는 10일 새벽 폭동으로부터 주민들의 상가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 순찰을 하다 흑인 폭도들의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자칫 인종 간 보복 폭력이 생길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러나 희생자 중 한 명인 자한 씨의 아버지 타리크 자한 씨(45)가 “더 이상 폭력은 없어야 한다”며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켜 가까스로 유혈사태를 막았다. 자한 씨는 이후 폭동 정국에서 ‘용서와 화해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본보 12일자 A1면 [지구촌 청년 폭동]아버지의 눈물, 분노를 잠…

그가 던진 화합의 메시지는 이날 장례식장에서 또다시 온 도시에 울려 퍼졌다. 공원에 모인 무려 2만5000여 명의 시민은 대부분 버밍엄에 사는 무슬림들이었지만 백인이나 흑인, 기독교인, 유대인 등도 적지 않았다. 인종과 종교는 달라도 같은 도시에 살던 이웃 청년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한 영국인 할머니는 “이 청년들은 나의 자녀들일 수도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북받쳐 올라와 이곳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행사는 이슬람교 형식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라마단 기간이었기 때문에 술이나 음식, 담배연기는 눈에 띄지 않았고 유족과 친지들의 오열 소리 외에는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였다. 참가자들은 아들을 잃고도 폭동 당시 비폭력을 역설했던 타리크 자한 씨의 용기를 하나같이 높이 평가했다. 버밍엄 시 공무원 주베다 림바다 씨(35)는 “무슬림이든 아니든 간에 당시 그가 던진 말들은 우리가 모두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가치다. 우리가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장례식을 마친 운구행렬은 청년들이 숨진 현장인 더들리 가(街)를 지나갔다. 이곳엔 추모 꽃다발과 양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룬 자한 씨의 친구 아프잘 칸 씨는 추모 방명록에 “너에게서 전화가 올 것 같아서 아직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어. 네가 어딘가 살아있을 거란 생각에 네 전화번호를 지울 수가 없어”라고 적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청년들의 희생은 이번 폭동의 상징으로 기억돼 아마도 영국 사회를 바꿔놓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