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타임스(NYT)는 21일 “반군이 픽업트럭을 타고 트리폴리로 진군하는 데 정부군 측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았다. 정부군이 녹아 없어진 듯하다”고 전했다. 군사력이 열세였던 반군이 트리폴리에 무혈입성한 배경은 무엇일까. 》
[1] 트리폴리 6개월 잠복 ‘슬리퍼 셀’이 반군 승리 일등공신
우선 트리폴리 곳곳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잠복요원(sleeper cells)’들의 공이 컸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22일 보도했다. 이들은 지난 6개월간 트리폴리 구석구석에서 카다피군의 저격수와 총잡이로 위장 잠입하며 결전의 날을 손꼽아 온 비밀조직. 트리폴리 근처 해안과 미스라타를 통해 들어와 잠입했으며 규모는 2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언론은 20일 밤(현지 시간) 트리폴리 내 사원들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신은 위대하다(Allahu Akbar)’는 메시지가 이 비밀 조직의 행동을 깨우는 ‘큐 사인’이었다고 전했다.
이튿날 21일 요원들은 트리폴리 동쪽에 있는 타주라에서 온 반군들과 합세해 트리폴리 진입을 도왔다. 자위야 자다임 마야 등 서쪽에서 온 반군들의 기습 공격은 이들에게 힘을 보탰다. 22일 반군이 카다피 정권의 최정예 부대인 ‘카미스 여단’과 무기창고를 접수하자 전세는 반군 쪽으로 돌아섰다. 카미스 여단은 트리폴리에서 약 27km 떨어진 곳에 주둔한 부대로 카다피의 7남 카미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22일 AP통신은 반군이 이 부대를 급습하자 잠깐 동안 총격전이 있었지만 잠시 후 카다피군이 기지를 도망갔다고 전했다.
이처럼 카다피 측의 주요 인사가 하나 둘 떠난 트리폴리는 반군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압델 하피즈 고가 과도국가위원회(NTC) 부의장은 이번 공격에 대해 “트리폴리 내 잠복요원들과 동부 남부에서 온 반군들 간의 협조가 있었으며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여름 내내 트리폴리 내 잠복요원들은 도시 내에서 비밀스럽게 훈련하고 반군과 무기를 모았으며 다른 지역 반군들과 연락했다. 오랫동안 이 작전을 기다리고 계획하고 희망해 왔다”고 보도했다. [2] 카다피 돈줄 마르자 軍 전투의지도 고갈
이와 함께 반군 스스로도 깜짝 놀랄 승전이 현실화된 이유는 말라버린 ‘카다피의 돈줄’이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크게 하락시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지금까지 카다피 병력은 친위부대와 용병이라는 양대 버팀목으로 유지돼 왔다. 막내아들 카미스가 지휘하는 친위부대는 리비아 최정예 부대이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그래서 카다피 원수는 내전이 시작되자 하루 1000달러를 주겠다면서 이웃 국가들에서 대대적으로 용병을 모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반군에 투항한 용병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참전 일당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리비아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한 초기에 카다피 일가의 재산을 동결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2월 한 달 동안에만 미국 300억 달러를 비롯해 캐나다 24억 달러, 호주 17억 달러, 오스트리아 12억 달러, 영국 10억 달러, 스위스 6억5000만 달러 등 300억 달러가 넘는 카다피 일가 재산이 동결됐다. 특히 각국은 카다피 일가의 유동자산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워 수상한 현금 흐름이 나타나면 즉시 이를 차단했다. 결국 카다피 가문은 용병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힘들 수밖에 없게 됐다.
몇 달 동안 약속된 돈을 받지 못한 데다 카다피 정권의 몰락이 명백해진 상황에 처하자 용병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면 돈을 받을 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트리폴리에서 시가전이 벌어지자 대다수 친카다피 병력이 싸워볼 생각도 않고 도주했다고 보도했다.
용병이 아닌 리비아 국적 군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몇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정규군 200여 명이 지난달 트리폴리 인근 전투장에서 총 한 방 쏘지 않고 반군에게 투항한 사례도 있다. 카미스 휘하의 ‘32여단’도 21일 별다른 저항 없이 반군에게 투항했다. [3] 측근부대 배신… 美-나토 측면지원 주효
외신들은 카미스 여단 내의 배신과 반군의 적절한 작전방향 선택 그리고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 등 측면 지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징집병이 아닌 카다피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한 청년들로 구성 ‘카미스 여단(32여단)’이 특별한 저항 없이 반군에 접수된 것은 카다피 측 내부의 배신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 반군 고위 간부는 “카미스 부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이 몇 년 전 카다피가 자신의 형을 숙청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반군에 투항했다”고 말했다.
반군의 진격 방향도 중요했다. 반군의 주력인 동부 반군은 그동안 동쪽 벵가지에서 시작해 제3의 도시인 미스라타 등 항구도시와 주요 시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카다피 세력도 동부 반군을 대항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카다피 세력이 서쪽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식으로 활동하던 서부 반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탓에 이날 서쪽에서 진격해 들어오는 반군에 트리폴리를 쉽게 내줬을지 모른다고 미국 LA타임스는 분석했다.
나토는 지속적인 공급으로 정부군의 대규모 이동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미국이 트리폴리와 주변에 대한 항공 감시를 대폭 강화한 것도 트리폴리 점령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뉴욕타임스는 22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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