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가 현실화되면 3년 전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유로존 국가들이 힘을 합쳐 그리스의 디폴트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이는 재정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미봉책이기 때문에 위기가 반복적으로 재연될 개연성도 큰 상황이다. 고용악화 신용등급 강등으로 더블딥(경기회복 후 재침체) 우려가 커지는 미국의 재정위기와 화학적으로 결합할 경우 예상을 뛰어넘는 위기가 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대외경제변수에 취약한 한국 경제에는 상당한 충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그리스 디폴트는 ‘제2의 리먼 사태’
독일과 프랑스 정상들이 14일(현지 시간)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며 디폴트 위험을 배제했지만, 시장은 그리스를 사실상의 디폴트 상태로 보고 있다. 그리스의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가 지난해 말 대비 46.75% 포인트나 높아졌고 그리스 국채의 1년 만기 수익률은 135%에 이를 정도로 불량 채권으로 전락했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리먼 사태급의 충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국채를 보유한 유럽 은행들은 약 220억 달러 규모의 손실이 불가피하고, 아시아 유럽 미국 등 글로벌 금융시장은 연쇄적인 충격에 빠질 개연성이 크다. 리먼 사태 때인 2008년 10월 한국 금융시장은 코스피가 800 선으로 주저앉았고, 원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원-달러 환율도 1500원대로 치솟았다. 2008년 4분기 광공업 생산지수는 전년 동기대비 ―10.9%, 2009년 1분기에는 ―15.7%로 곤두박질치면서 가파른 경기침체가 현실화됐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쇼크에 빠지면 실물경기도 리먼 사태 때와 비슷한 경로로 악화될 소지가 농후하다. 미국 신용등급이 강등되고 8월 고용자 수 증가가 정체하면서 더욱 커진 더블딥 우려와 맞물려 감당하기 힘든 위기가 올 수도 있다. 함준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유럽, 미국의 경기침체가 현재의 상황만 유지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미칠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수출 둔화와 그에 따른 기업투자 위축이 실물경기 악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 디폴트 피해도 악영향 불가피
그리스 디폴트가 현실화되지 않아도 우리 경제에 미칠 악영향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지난 2개월간 △미국 신용등급 강등 △유럽계 은행 자금난 △미국 고용 쇼크 △프랑스 대형 은행 신용등급 강등 등 네 차례의 쇼크를 겪으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가 침체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석하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동향 연구팀장은 “그리스 디폴트 문제는 경제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합의가 필요한 사건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적극적인 그리스 구제 의지를 밝혔지만 각국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기가 어렵다. 결국 유로존 위기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15일 “유로존 문제는 해결이 어려울 것이고 결국 올 4분기나 내년 초에 이 문제가 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각국 공조와 재정위기 당사국의 강력한 긴축이 병행되지 않으면 (위기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지난해부터 불거지면서 우리 경제는 간접적이지만 악영향을 꾸준히 받아왔다. 지난해 1분기 2.1%(전기 대비)였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 2분기에 0.8%로 떨어졌다. 우리 경제의 중추인 광공업 성장률은 같은 기간 22%→7.3%로 추락했다. 재정부는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4%대 후반에서 더 낮출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위기, 하루아침에 해소되지 않는다”
지표만 놓고 보면 우리 경제가 아직까진 튼튼해 보이지만 정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재정부는 15일 환율이 급등하자 1년 5개월 만에 ‘구두 개입’하는 강수를 뒀다. 재정부 은성수 국제금융국장은 “어떠한 방향이든 환율의 지나친 급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환율 상승세를 좀처럼 꺾지 못했다. 환율이 14일 30원 급등한 것에 이어 15일에도 20원 이상(1098∼1119원) 출렁인 것 자체가 현재의 외환시장 상황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금융당국은 최악의 상황에서 국내 은행들이 버티지 못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지난달 12개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외환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상당수 은행이 기준에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 외화유동성 확보를 주문했다. 위기강도를 3단계로 구분해 외화차입 차환율(만기연장비율) 등 10여 개 기준에 따라 테스트했는데, 최악의 위기가 닥칠 경우 정부의 도움 없이는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내 외화자금의 약 30%가 유럽계 자금이고 위기가 현실화되면 이 자금이 가장 먼저 빠져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국제거시금융연구실장은 “우리나라 은행은 외화자금 조달을 외화예금보다 차입에 의존하는 조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제금융시장의 자금경색에 취약하다”며 “특히 국내은행의 유럽계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 비중이 크기 때문에 유럽지역이 위기의 진원지가 되면 충격이 클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업도 위기상황에 대비해 투자를 보류하고 전방위로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15일 한국은행 및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올해 들어 은행 대출 및 직접금융시장에서의 조달을 통해 모두 60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자금 조달 규모인 64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2009년 자금 조달액 49조 원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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