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獨마저… 교황, 첫 국빈방문서 잇단 수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의원들 ‘의회연설’ 보이콧에 방문반대 수천명 시위까지
낙태-동성애 ‘보수정책’ 화근… 전임 요한바오로2세와 대조

교황 베네딕토 16세(84)가 즉위 후 처음으로 모국인 독일을 찾았지만 따뜻한 환대가 아니라 냉랭한 비판과 반대시위에 직면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22일부터 독일을 국빈방문 중인 베네딕토 16세는 첫날 베를린 하원에서 한 20분간의 연설에서 “우리, 독일은 권력이 부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며 나치 히틀러를 비유해 정치인의 권력 남용과 부패를 경고했다. 교황은 앞서 대통령궁 환영 행사에서는 “우리 사회가 종교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교황은 2005년과 2006년 세계 청년의 날 행사가 열린 쾰른 시와 고향인 바이에른 지방을 사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지만 공식 독일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교황의 방문은 곳곳에서 거센 반발을 부르고 있다. 의원 620명 가운데 주로 좌파 야당 의원 100여 명은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이날 교황의 의회 연설을 보이콧했다. 녹색당은 “교황이 야외나 교회,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지만 의회 연설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

같은 시간 베를린 시내 포츠담 광장에선 수천 명이 모여 ‘교황은 당신의 집으로 떠나라’ ‘종교는 적게=인권은 더 많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교황이 성직자의 성범죄를 외면하고, 콘돔 사용과 동성애에 반대하는 등 지나치게 보수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항의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독일에서는 18만1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직자들의 성추문에 실망해 교회를 떠났다.

교황은 기자들을 만나 “(성추문) 희생자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은 이제 내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가 성추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신자들의 인내를 당부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지난달 세계청년대회 참석을 위해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국민의 94%가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은 유럽 최고의 실업률 속에서 재정적자 위기까지 겹쳐 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도 교황 방문에 1500억 원을 쏟아 붓는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흥분한 국민은 “교황을 위해 쓸 돈은 없다”며 연일 집회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해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일부 성직자까지 이런 견해에 동조했다.

지난해 9월 영국 방문 때는 야외미사 티켓을 유료로 판매해 “교회가 장사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교황청은 영국 정부에 부담을 덜 주고 교회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반발은 계속됐다.

이는 고국 폴란드는 물론이고 모든 방문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와 대조돼 교황청 관계자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다음 해인 1979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교황으로는 첫 공산국가 방문이었다. 그는 이때 민주화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공산 체제에 신음하던 폴란드와 동유럽에 거대한 자유화 물결을 촉발시켰고 이는 14개월 뒤 소비에트 체제 최초의 반체제 노조였던 자유노조연대 결성으로 이어졌다. 고국 방문 9일 동안 폴란드 인구의 3분의 1인 1000만 명이 그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처럼 두 전현직 교황의 희비가 엇갈리게 된 데에는 과감한 반성을 통해 교회의 변화 및 ‘다름’과의 화해를 추구한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베네딕토 16세가 즉위 후 낙태, 동성애, 성직자 성범죄 등 민감한 이슈에서 보수적 색채를 더 강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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