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는 “올 한 해 지구촌을 달구고 있는 각국의 시위는 정당과 선거, 노동조합을 통해 이뤄지던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반영하고 있다”며 “전 세계에서 기존 (정당) 정치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내건 미국 시위대에는 실업자와 함께 정치권이 월가 개혁에 실패한 데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청년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인들은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월가 시위대의 움직임을 제도권 정치에서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프랭클린&마셜 칼리지의 테리 마돈나 정치학과 교수는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번 시위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석 뉴욕유권자센터 상임이사는 “금융자본가의 탐욕을 겨냥한 월가 시위대의 움직임을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활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랑스에서는 청년층의 불만이 이미 지난해부터 각종 지방선거와 최근 치러진 상원 선거 등에서 기존 정치권을 흔들고 있다. 여당은 단 한 번의 선거도 승리하지 못했다. 내년 4월 말 치러지는 대선에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은 평균 60%를 넘는데 20대에서는 이보다 더 높은 80%를 상회한다.
그동안 계속 중도 지향적인 노선을 걸어온 사회당에서 복지와 연대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사회주의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도 무관치 않다. 사회당 경선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표가 대통령과 공직의 임기 축소 등의 공약을 내건 것도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달래기 위한 배경을 깔고 있다.
일당통치체제인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인터넷을 휘젓고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은 이른바 ‘펀칭(憤靑)’, 분노한 청년들이다. 4일 중국판 트위터인 시나닷컴 웨이보(微博)에서 펀칭으로 검색하면 160만 건의 글이 떠오른다. 이들은 빈부격차와 취업난, 나혼(裸婚·가진 것 없이 하는 벌거벗은 혼인), 치솟는 부동산을 보며 자신들의 잿빛 미래에 분노한다. 중국 펀칭의 위력은 아직은 정부에 대항하는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지만 영향력은 상당하다.
7월 23일 원저우(溫州) 고속철 추돌참사에서 여론을 주도해 중국 정부를 압박한 주력군이 다름 아닌 펀칭이었다. 베이징의 한 전문가는 “사고가 난 뒤 정부가 즉각 대책(고속철 속도 조정과 안전 재점검)을 내놓았던 것은 매우 드물었던 일”이라며 “들끓는 여론을 만들고 주도한 것은 펀칭으로 대표되는 ‘바링허우(八零後·1980년 이후 출생자)’세대”라고 분석했다.
장기 불황을 거치면서 사회 불만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대규모 시위나 폭동 등의 형태로 표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일본에서도 최근 도쿄 도심에서 6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이는 수십 년 만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명분은 탈원전이지만 누적된 정치사회적 불만이 없었다면 일반 시민이 정부 비판 피켓을 들고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일본에선 상상하기 힘들다. 이 같은 일본 민심의 변화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보여준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에 대한 정치적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통 큰 기부와 동시에 친환경 에너지 개발, 신속한 복구를 향한 실천에 나서자 ‘손정의 대망론’ ‘손정의를 총리로’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3일 보도된 마이니치신문 여론조사에서 민주당(16%) 자민당(18%) 지지율을 합쳐도 34%에 불과한 반면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9%나 나온 것은 국민이 이제 제도권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청년층의 분노가 가져올 정치 지형의 미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토드 기틀린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월가 시위의 양상을 “기계 없는 에너지(energy without machine)”라고 표현했다. 기존 정당이나 노동운동과는 다르게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조직 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조직적인 의견 수렴과 대안 제시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마이클 카진 조지타운대 교수도 “역사적으로 미국의 민권운동이나 노동운동도 처음에는 정치 제도권 밖에서 출발했지만 행동력을 보강하기 위해 정당과 제휴하는 방식을 택했다”며 “티파티가 공화당의 일부가 됐듯이 월가 시위대가 민주당과 힘을 합치는 방식으로 꼭 나아갈 필요는 없지만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도 높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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