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은행들이 그리스가 갚아야 할 빚의 절반을 사실상 탕감해 주기로 하면서 유럽 재정위기 해결에 실마리가 풀렸다. 또 유로존의 구제금융 기금을 2배 이상으로 늘리고 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데 합의함에 따라 금융시장의 유동성 위기도 어느 정도 해소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유럽연합(EU) 정상들은 2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10시간에 걸친 밤샘 마라톤 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의 그리스 구제방안에 합의했다.
○ 그리스 채무 1000억 유로 줄어
유럽 정상들은 이날 회의에서 은행 등 민간 채권자들의 그리스 채권에 대한 손실률(헤어컷)을 50%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손실률이 50%라는 것은 채권자들이 투자한 채권에 50% 손실을 본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 이에 앞서 7월 유럽 정부와 은행들은 손실률을 21%로 정하기로 합의했지만 이 정도로는 그리스가 재정위기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유로존 정상들은 “그리스가 갚을 수 있는 수준까지 빚을 줄여줘야 한다”며 은행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손실률 확대를 사실상 강제한 것이다.
또 정상들은 유로존 구제금융 재원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현재의 4400억 유로에서 1조 유로 수준으로 확대하고 은행들이 내년 6월까지 1060억 유로의 자본을 확충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유럽 정상들의 이 같은 포괄적 합의로 그리스가 갚아야 할 채무는 약 1000억 유로가 삭감돼 국가부채 규모가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60%에서 2020년 120%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 EFSF 기금이 크게 늘어나면서 그리스와 함께 유동성 위기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국채 발행이나 자금 조달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27일 “그리스의 빚 부담은 이제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 됐다”고 평가했다. 유로존의 합의 소식에 이날 아시아 증시는 상승 마감했고 유럽 증시도 급등세로 출발했다.
○ 중국 등 신흥국에 손 벌리는 유럽
이번 합의로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의 연쇄부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단 막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융시장에 닥친 발등의 불만 껐을 뿐 유로존 전반의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은 아직 요원하다는 평가도 있다. 은행의 손실률 확대 또한 사실상 그리스의 부분적 디폴트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1조 유로로 확충된 EFSF가 재정위기를 막는 데 충분할지, 또 기금 조달은 어떻게 할지도 풀어야 할 숙제다. 구제금융 기금이나 은행 자본 확충에는 결국 각국의 세금을 투입해야 함에 따라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선 벌써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중국이나 브라질 등 신흥 부국에 손을 벌리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당장 28일에 클라우스 레글링 EFSF 최고경영자(CEO)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의 EFSF 투자 문제를 논의한다.
긴급처방을 내놓은 유럽국가 정상들은 이제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위기 당사국들이 자국에서 긴축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심각한 재정위기의 빠른 해결을 바라는 것은 무리지만 적어도 유럽 각국이 재정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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