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기술 가르치는 한국봉사단원들 1994년 인구 1000만 명 중 10%가 사라진 종족학살을 겪은 르완다가 요즘 아프리카 번영과 인종 화합의 상징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도와 한국국제협력단이 조성한 ‘르완다 판 새마을 시범마을’ 키가라마에서 재봉기술을 배우는 르완다인들을 한국봉사단원들이 돕고 있다. 키가라마=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아프리카 최빈국(세계 140위) 중 하나인 르완다에는 거지가 없다. 수도 키갈리의 도로는 깨끗하고 교통신호도 잘 지켜진다. 잘 정비된 주택가를 좀 과장되게 말하면 남유럽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다. 하지만 이 나라 전역에는 끔찍한 상흔이 남아 있다.
1994년 100여 일에 걸친 부족 전쟁으로 이 나라에선 100만 명이 숨졌다. 다수 부족 후투족과 소수 부족 투치족의 내전으로 인구 1000만 명 중 10%가 사라진 것이다. 분(分)당 사망자 6.9명, 홀로코스트 때 유대인들이 살해당한 속도의 3배에 이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짧은 시간에 이뤄진 대량 학살이다.
그 후 17년이 흐른 지금 르완다에서는 ‘투치’니 ‘후투’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다. 끔찍한 학살의 기억에 발목 잡혀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무언의 노력인 것이다.
끔찍한 악몽을 딛고 일어선 결과 요즘 르완다는 아프리카 인종화합과 번영의 상징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 제노사이드(한 민족이나 특정 집단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자행되는 대량 학살)가 일어난 1994년 이후 2010년까지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을 제외하고 매년 평균 경제성장률이 7∼10%에 이른다. 초등학교 진학률도 90%대에 이르고 한때 6%대였던 에이즈 감염률도 3%대로 떨어졌다. 요즘은 한국을 롤모델로 삼아 ‘정보통신 강국’을 위한 프로젝트를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키갈리에 있는 웬만한 호텔이나 관공서에서는 모두 와이파이가 된다.
르완다 재건의 성공에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주민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정치적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다. 아프리카 인구밀도 1위인 이 나라에서 학살은 이웃 간에 자행됐다. 학살이 끝난 후에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마을에 사는 일이 흔했다. 내전 후 불특정 가해자를 잡아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자체적인 해결책 ‘가차차’(잔디가 깔린 마당이라는 뜻)를 도입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해자가 죄를 고백한 뒤 피해자가 용서를 해주면 감옥행 대신에 피해자 집을 지어주거나 마을 도로를 보수하는 사회봉사명령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키갈리 시내의 학살 현장인 기소지 박물관에서 만난 안내원은 “‘가차차’로 원한이나 증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앙갚음은 다시 피를 부른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어차피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르완다 재건의 일등 공신으로 폴 카가메 대통령(54)을 꼽는다. 3세 때 종족 분규로 우간다로 피신해 난민촌에서 자란 그는 이후 투치족 난민들이 결성한 반군조직 르완다애국전선 총사령관에 올라 1994년 내전을 종식시키고 2003년 신헌법에 따라 첫 직선 대통령이 되었다. 지난해 재선에도 성공해 2017년까지 재임한다.
카가메 대통령이 집권 후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치안 안정과 부패 일소. 수도 키갈리에는 어둠이 깔리는 매일 오후 6시만 되면 군인과 경찰들이 거리로 나와 치안을 맡아 11시, 12시에도 여자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아프리카 나라 중 몇 안 되는 안전한 나라가 됐다. ▼1년새 ‘기업하기 좋은 나라’ 143위→67위 최단기록▼
아물지 않은 학살의 상처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있는 기소지 박물관에는 1994년 인종학살의 현장을 보여주는 각종 이미지와 피해자의 유골 및 유품이 가득하다. 방 한칸에 빼곡하게 걸린 당시 숨진 어린이들의 사진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키갈리=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공무원들의 청렴성도 대단하다. 이용완 주르완다 KT 소장은 “사업 대금을 지불하는 데 뒷거래가 없었다. 의사결정 과정은 다소 느리지만 서로 감시를 하기 때문에 떼어먹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고 전했다.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르완다인 길버트 씨도 “르완다에서는 교통경찰에게 돈을 쥐여주었다가는 바로 감옥행”이라고 전했다. 4개월 전 키갈리에 한국 식당을 연 이강수 사장(56)은 “케냐에서 한식당을 할 때는 공무원들이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는데 여기 와서는 지금까지 공무원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외국인 창업도 개방적이어서 24시간 만에 허가증이 나왔다”고 전했다.
실제로 르완다는 월드뱅크가 선정한 ‘비즈니스 하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2009년 143위에서 2010년 67위로 올라 기록을 낸 이래 최단 기간에 도약한 나라로 꼽혔다. 르완다 극빈자들을 위해 국제 구호단체가 설립한 UOB은행의 이종흠 행장(재미교포)은 “제노사이드를 막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원조를 해주려는 서방국가가 많은데 원조 받는 공무원들이 청렴하고 발전상이 눈에 보이니 지원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지도에서 국가 이름을 국경 밖에 인쇄해야 할 정도로 작은 나라지만 원조 규모는 세계 10위권이라고 한다.
물론 이 나라 사람들이 상처를 잊은 것은 아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원 박제영 씨는 “매년 4월 추모의 달에는 가게들도 문을 닫고 사람들 표정에 웃음이 사라져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며 “매년 추모식에는 수십 명이 통곡하다 기절해 실려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용서하고 화해하되, 잊지는 않겠다’는 르완다인들의 다짐은 곳곳에 보존된 학살 현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수도 키갈리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부게세라’라는 마을에는 울창한 나무 숲 안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은타마라 교회가 있다. 24일(현지 시간) 오전 10시, 기자는 어두컴컴한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흙더미에서 건진 듯한, 피에 절어 말라붙은 옷가지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었다. 오른쪽에는 해골과 유골들이 가득했다. 성인 남자 키만 한 높이의 3단 철제 선반 1층과 2층에 해골이 4열 종대로 모여 있었고 3층에는 유골이 잔뜩 쌓여 있었다. 족히 500명의 것은 되어 보였다. 1994년 내전 때 이곳 은타마라 교회에서만도 한날한시에 투치족 5000명이 죽었다. 르완다 정부는 이처럼 학살 현장 중 6곳을 외부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학살 트라우마’ 때문에 거의 찾지 않고 외국인들만 띄엄띄엄 방문한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1994년 유엔은 르완다 사태를 유엔 창설 후 처음으로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학살 과정 역시 극악무도해 르완다 카게라 강과 니아바롱고 강에는 석 달 동안 사람의 머리와 수족이 떠다니는 지옥이 연출됐음을 키갈리 기소지 박물관에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은타마라 교회에서 만난 발렌시아 씨(34)는 16세에 부모형제가 모두 죽은 생존자 중 한 사람. 그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답이 돌아왔다.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말투와 표정이었다. 한참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잊을 수는 없지만…언제까지나 복수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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