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낮 12시 30분.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빌딩(NPC) 13층 대형 회의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20여 개 방송사의 대형 카메라와 카메라 기자들은 연단 맞은편과 복도를 빼곡히 채웠다. 32달러(약 3만6000원)짜리 오찬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티켓을 못 구한 사람들은 점심을 거른 채 복도에 서서 연설을 들어야 했다.
이날 초청 인사는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하고 있는 허먼 케인 전 갓파더스피자 최고경영자(CEO). 전날 정치 전문매체인 ‘폴리티코’가 케인 전 CEO가 1990년대 중후반 전미요식업협회 회장 재직 때 협회 여직원 2명을 성희롱했다는 의혹을 보도한 직후여서 이날 연설은 더욱 큰 주목을 끌었다.
케인 전 CEO는 연설을 시작하기 전 자신이 앉은 메인테이블에 음식을 나르던 흑인 웨이터 앤드루 프라이스 씨를 소개하면서 “앤드루가 이곳에서 그동안 대통령 8명을 접대했다고 한다. 내가 앤드루로부터 접대받는 9번째 대통령이 될 것 같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어 1시간 남짓한 연설과 질의 답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집중 공격했다. 당내 경쟁후보인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나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케인 전 CEO는 “미국은 지금 경제 위기에 국가안보 위기까지 겹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며 “이 모든 게 백악관의 심각한 리더십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1986년 내가 갓파더스피자를 맡았을 때 회사는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며 “피자회사를 살려냈듯이 미국을 개조하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케인 전 CEO는 연방소득세와 법인세 판매세를 모두 9%로 통일하는 자신의 9-9-9 세금정책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왜 9-9-9냐고 묻는데 8-8-8로 하면 수입이 너무 적고 10-10-10으로 하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언제 대통령에 출마할 결심을 굳혔느냐’는 질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건강보험개혁법안인 ‘오바마케어’에 서명했을 때”라며 “내가 만약 오바마케어 서명 이후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희롱 의혹 보도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성적으로 희롱한 적이 없다. 근거가 없는 허위사실로 마녀사냥식 인신공격”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노래로 연설을 마무리할 수 있겠느냐’는 사회자의 즉석 제의를 받고 “선거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 내 신념을 담은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며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경선 초반 하위권에 머물렀던 케인 전 CEO가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는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와 함께 누구에게나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그의 자수성가 인생 스토리가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다 경기 침체로 정치인이 아닌 경제대통령을 원하는 민심도 반영되고 있다. 공화당 대선주자 가운데 유일한 흑인인 그는 가난하고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의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나 자랐다.
여기에다 뛰어난 유머 감각, 투박한 화법이 어우러져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학생 10여 명과 함께 강연장을 찾은 질 클라인 아메리칸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직설적 화법에다 비즈니스맨 출신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는 그레그 갠디 씨는 “지금 미국이 원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인이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케인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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