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정권때 빈곤율 낮추려”… 20만명 피해 주장도
인권단체 의혹 제기… 현 정부 지난달 전면조사 착수
페루 리마에 사는 빅토리아 비고 씨(49)는 1996년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아기는 미숙아로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본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 비고 씨는 병원에서 의사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원해 있는 자신의 난관을 묶는 불임수술을 했다는 것. 비고 씨는 그 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임신을 못 하고 있다. 그녀는 “난도질당한 느낌이다. 엄마와 여성으로서 내 권리를 빼앗겼다”고 통탄했다.
페루에서 이런 일을 당한 사람은 비고 씨뿐이 아니다. 현지 인권단체들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사진)이 집권했던 1990년대에 2000명이 넘는 여성이 동의 없이 불임수술을 당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선 보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합치면 피해 여성이 20만 명에 육박할 것이란 추정도 한다.
CNN과 남미 현지 언론들은 21일 “올해 7월 집권한 오얀타 우말라 정부가 후지모리 정권 당시 자행된 강제 불임수술 의혹에 대해 지난달부터 전면 조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페루의 인권·여성단체들에 따르면 당시 정부 주도로 강행된 불임수술은 안데스 산맥이나 아마존 강 유역 원주민들이 사는 산골 마을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은 이들 지역의 출산율을 낮춰 국가 전체의 빈곤율을 떨어뜨려 보겠다는 취지였다. 병원들마다 불임수술 할당제까지 도입됐다. 페루 여성단체 간부인 로시 살라사르 씨는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한 달에 3명 이상 불임수술을 하게 하고 이를 지키면 인센티브를 줬다”고 증언했다. 의사들은 다른 질병으로 찾아온 여성 환자들을 몰래 수술하거나 남편 등 가족을 협박해 강제로 동의서를 쓰게 하는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웠다고 한다. 또 수술 대상자가 대부분 빈곤층임을 이용해 상품 등을 미끼로 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특정 원주민들이 사는 몇몇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져 또 다른 ‘인종 학살’이 아니냐는 논란도 거세게 일었다.
이 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2000년대 초 페루 정부와 한 피해자 가족의 소송 건이 알려지면서부터다. 1996년 33세였던 마리아 메스탄사 씨는 “당신은 이미 자녀가 5명이 넘어 불임수술에 동의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병원 측의 협박에 못 이겨 불임수술을 받은 뒤 그와 관련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사법당국은 2009년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이 건에 대한 수사를 보류했다. 하지만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인 게이코 후지모리가 올해 대권에 도전했다 실패하면서 불임수술 문제에 대해 전반적인 재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수술 피해자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후지모리 정권 당시 관료들은 “수술동의를 일일이 받았다”며 맞서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보건장관을 지낸 마리노 바우에르 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 정책은 빈곤층을 타깃으로 삼지 않았고 하물며 (수술을 위한) 인센티브를 제공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1990∼2000년까지 권좌에 머물렀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이미 부패 등의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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