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폭행한 자와 결혼해야 한다니…”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5일 03시 00분


■ 21세 아프간 여성 굴나즈 씨의 비참한 운명

굴나즈 씨(21)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었지만 그녀의 미래는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다. CNN 등 외신들은 여권(女權)의 불모지인 아프간 사회에서 한 여성이 겪고 있는 비참한 운명을 24일 전했다.

2년 전 어느 날 굴나즈 씨의 집에 별안간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다며 집을 비운 사이였다. 이 남자는 대문과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그녀를 덮쳤다. 굴나즈 씨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남자는 손으로 입을 막고 손쉽게 그녀를 제압했다. 남자는 다름 아닌 그녀 사촌의 남편이었다.

굴나즈 씨는 이 일을 혼자 묻어두기로 했다. 아프간 사회의 관습상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알려지면 가족들에 의해 ‘명예살인(honor killing)’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의 배 속에는 이미 성폭행범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경찰은 뒤늦게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녀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간통범으로 몰려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12년 형을 받은 굴나즈 씨는 수도 카불의 가장 악명 높은 감옥에서 딸을 출산했다.

기가 막힌 일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법원 판사는 “감옥을 나가게 해줄 테니 그 대신 아이의 아빠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면 ‘혼외정사’는 자연히 없던 일이 되고 ‘실추된 가족들의 명예’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폭행범과 결혼하라는 얘기에 굴나즈 씨는 물론 처음엔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결국 이 끔찍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간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가족들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처지였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건 두 살배기 딸이었다. 굴나즈 씨는 “딸은 아무런 죄도 없다. 내 삶은 이미 망가졌지만 내 자식의 삶은 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했다.

굴나즈 씨의 이야기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은 한 촬영팀이 그녀의 딱한 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알려졌다. 굴나즈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여성들을 위해 촬영에 응했지만 정작 EU가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여성들의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막판에 개봉을 취소했다. 미국 국무부는 22일 브리핑에서 “아프간 사법당국이 굴나즈 씨의 권리를 존중해 적절한 법 집행을 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향후 굴나즈 씨가 정말 성폭행범과 결혼하고 감옥에서 풀려날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아프간 검찰은 23일 “굴나즈 씨의 형기를 3년으로 줄인다”고 발표하며 혐의를 ‘간통죄’에서 ‘사건을 빨리 신고하지 않은 죄’로 수정했다. 상대 남성은 성폭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며 간통죄 혐의로 다른 교도소에 갇혀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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