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월 무정부’ 벨기에 결국 신용강등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8일 03시 00분


S&P“금융위기-국가부채 대응력 의문” AA+→AA 하향
정치권, 예산 감축 합의했지만 정부 구성은 계속 불투명

정치권이 정파적 이익에만 집착해 정부 구성을 미뤄 오는 바람에 세계에서 가장 긴 17개월 동안의 무정부 상태를 이어온 벨기에가 결국 국가 신용등급 강등을 맞았다.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25일 벨기에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추고 ‘부정적인’ 향후 전망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AA+로 낮춰진 후 11개월 만이다. S&P가 밝힌 강등 이유는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정치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면서 금융 부문과 국가 부채에 대한 대응 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치권은 26일 뒤늦게 내년도 예산안 감축안에 합의했다. 예산안 합의로 정치권은 일단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타협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지방자치권의 대폭 확대를 원하는 북부 플레미시 지역(네덜란드어 사용권)과 이에 반대하는 남부 왈로니아 지역(프랑스어권)이 힘을 합쳐 지난해 6월 13일 총선 후 이어져온 무정부 상태를 완전히 타개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신용등급 하락과 국채 금리 상승 같은 경고성 빨간불이 잇따라 켜졌지만 정치권은 계속 무시해 왔다.

벨기에의 무정부 상태는 독특한 선거 방법과 지역적 분열이 불러온 복합적 결과다. 벨기에서는 플레미시 유권자의 경우 플레미시권 정당에만, 왈로니아 유권자의 경우 왈로니아권 정당에만 투표할 수 있다. 자신의 의사대로 선호 정당을 선택할 수 있는 유권자는 수도 브뤼셀과 인근의 브뤼셀-알레-빌보르데(BHV) 지역 주민뿐이다. 또 집권하려면 네덜란드와 프랑스 언어권 지역의 정당 4개 이상이 연합해야 한다. 지난 총선(총 150석)에선 플레미시의 분리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는 ‘새플레미시연대(N-VA)’가 27석으로 1당, 남부 왈로니아 사회당이 26석으로 2당이 됐다.

군소 정당에서 약진한 N-VA는 북부 주민이 낸 세금이 남부 주민의 지원을 위해 너무 많이 쓰이고 있다며 지방자치권과 지역 예산 편성권의 획기적인 확대를 내세워 연정 협상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N-VA의 연정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며 총선 당시 총리였던 아브 레테름이 이끄는 ‘관리 내각’(새 정책은 수립하지 못하고 기존의 일반적 정부 업무만 수행)이 최소한의 국가적 기능을 유지해 왔다.

이처럼 정치권 협상이 장기간 공전하는 바람에 벨기에는 올 1월 유럽 최장 무정부 기록인 네덜란드의 208일을 깬 데 이어 3월에는 세계 최장의 무정부 기록인 이라크의 289일마저 깼다. 이에 따라 6월에 발행한 3개월 만기 국채 수익률은 1.254%로 2년 만에 최고치로 상승했고 신규 자금 차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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