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인 국가부채 위기에 빠져 있는 일본 경제가 더는 버티기 힘든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일본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던 엔화 및 일본 국채의 가격마저 급락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유럽 재정위기가 미처 수습되기도 전에 일본 경제마저 무너지면 세계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장기 침체의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
일본은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세제 개혁 등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미 정치적 리더십이 실종된 탓에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추락은 일본 자금의 한국 이탈 등 국내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 일본 부도 확률, 말레이시아보다 높아
5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일본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1일 현재 1.36%로 말레이시아(1.34%)와 중국(1.32%)보다 높다. CDS 프리미엄은 국제금융시장의 대표적인 위험지표로 수치가 높을수록 시장에서 국채의 부도 확률을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CDS 프리미엄이 말레이시아보다 높아진 것은 지난해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이후 처음이다. 국제금융센터는 이날 보고서에서 “지난해 일본 무역수지가 31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보이면서 취약한 재정건전성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 유럽에 이어 일본도 국가신용등급 강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는 이미 지난해 일본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췄다. 같은 해 11월 S&P는 “노다 요시히코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고 경고했고, 무디스도 지난달 말 강등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선 빠르면 이달 중 일본의 등급이 내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 日 “더 추운 날들이 다가온다”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의 지난해 재정수지 적자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8.9%, 국가 부채는 211.7%로 추산된다. 현재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 5개국(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평균인 7.0%, 118.3%보다 나쁜 수치다. 일본 정부는 소비세 등 세수(稅收) 증대를 통해 대지진 복구비용을 비롯한 막대한 재정 지출을 충당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야당의 반대로 대책 추진 여부조차 불확실하다. ○ 日국채, 최고 안전자산 신화도 흔들
일본의 국가부채 문제는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민들이 국채를 사들여 든든한 국채 매수세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엄청난 부채비율을 감내할 수 있었다. 현재 일본의 기업과 가계는 일본 국채 매입자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덕분에 국채금리(10년 만기)도 1% 안팎으로 유지돼 왔다.
하지만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여기에 소득수지를 더한 경상수지마저 흑자 기조가 불투명해지면서 국채금리도 가파르게 치솟을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동안은 경상수지 흑자 때문에 엔화가치가 안정적으로 상승할 것이란 기대가 있어 낮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의 국채 수요가 많았다”면서도 “하지만 앞으로 일본 경제와 엔화가치가 불안해지면 채권 수요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또 고령화와 경기침체로 저축률이 떨어지면 일본 국민이 국채를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자국민의 채권 수요가 줄어들면 일본은 해외투자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경우 조달비용(금리)이 높아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짐 오닐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회장은 최근 “일본이 해외 의존도를 높이면 국채 수익률이 수년 안에 3.5%까지 오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최대 은행이자 기관투자가인 미쓰비시도쿄도 얼마 전 자국 국채의 가격 급락에 대비한 비상 계획을 작성했다. 이 은행은 일본의 경상수지가 2016년쯤에는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 한국 경제에도 부정적 파급효과
세계 3대 선진 경제권인 미국 유럽 일본이 일제히 신용등급 강등과 신용경색으로 장기침체 국면에 들어가면 개방경제인 한국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당장 국채 부도위험이 엔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면 한국은 일본과 경쟁하는 부문의 수출에 타격을 받는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일본에서 이런 식의 불안감이 계속 부각되면 엔화 강세는 지속되기 어렵고 상당한 약세로 돌아설 소지가 있다”며 “그나마 환율효과로 버텨 온 한국 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정식 교수는 “한국의 수출이 악화되면 경상수지에 문제가 발생해 국가신용등급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환율 하락으로 일본의 부품소재를 조금 더 싸게 수입할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일본 경제의 추락은 한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난해 한국의 대일(對日) 수출은 전체의 7%에 불과해 일본 내 수요 감소로 인한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국제외환시장에서 엔화가 무너지면 심리적 충격으로 외화 조달 비용이 올라가는 등 국제금융시장이 소용돌이에 빠질 개연성도 있다. 다만 지난해 미국 신용등급이 강등된 이후에도 미국 국채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처럼 일본의 신용등급이 내려간다 해도 우려한 만큼의 큰 충격이 없을 것이란 전망도 일각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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