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그후 1년]<2> 희망과 해방감으로 들뜬 트리폴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9일 03시 00분


“뉴 리비아 건설” 카다피 피해 고국 떠난 엘리트들 속속 귀국

《 지난해 2월 15일 리비아 제2도시 뱅가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10월 20일 무아마르 카다피의 사망으로 막을 내린 리비아 민주혁명은 사망자 2만 명, 부상자 5만 명, 실종자 3만 명 등 총인구 630만 명의 10%가 넘는 희생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카다피 사후 리비아는 현재까지도 비자 발급이 엄격해 입국하기 매우 까다롭다. 4월 1∼5일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그리고 내전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아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도시 미수라타를 둘러봤다. 》
리비아 식품의약청장이며 트리폴리의대 교수(생리학)를 겸하고 있는 아판 씨(49)는 1년 전 이맘때를 생각하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듯 안도의 한숨을 쉰다. 지난해 2월 17일 제2도시 뱅가지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분노의 날’ 시위로 유혈사태가 빚어졌다는 소식이 트리폴리에도 바로 전해지면서 학생과 시민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

이튿날 시내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됐고 군과 경찰의 철통감시가 시작됐다. 곧이어 공항이 폐쇄됐고 인터넷이 모두 끊겼다. 전기와 가스 공급이 중단돼 6km에 이르는 출퇴근길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 컨테이너 가건물에서 제자 20명이 집단 총살당한 현장을 목격한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제자들과 함께 밤에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낮에 모습을 보였다가는 총살당할지 몰라 다들 집에 숨어 있었다. 1년 전 트리폴리는 완전히 죽은 도시였다.”

3일 시내 청장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카다피를 쫓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우리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다. 이 모든 일이 꿈만 같다”고 했다. “새롭게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중이라 아직 명함도 없다”는 그는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를 딴 엘리트. “그동안 카다피 철권통치에 염증을 느껴 해외로 나간 제자들이 새로운 리비아 건설을 위해 돌아오고 있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카다피가 사망한 지 5개월 반. 수도 트리폴리엔 아직도 무장 민병대원들이 총을 들고 돌아다니지만 시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42년 독재를 끝내고 자유와 해방을 얻은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기엔 6개월은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로 시내를 완전히 뒤덮은 듯한 국기와 벽이란 벽에는 죄다 그려진 카다피 조롱 벽화들, ‘프리 리비아’ ‘카다피 아웃’ ‘리비아 승리’ 등의 구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을 겪은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축제를 벌이는 도시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지금 트리폴리는 ‘벽화의 도시’라 할 만하다. 시내 건물 벽이란 벽에는 카다피를 조롱하는 각종 표현들과 새장에서 새가 날아가는 모습 등 해방감을 표현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프리(해방) 리비아’ ‘아웃 카다피’ ‘리비아 승리’ 등 각종 낙서와 희생자들의 명단들도 벽에 빼곡히 들어찼다. 카다피를 발로 차는 벽화가 그려진 곳을 히잡을 쓴 리비아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트리폴리=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지금 트리폴리는 ‘벽화의 도시’라 할 만하다. 시내 건물 벽이란 벽에는 카다피를 조롱하는 각종 표현들과 새장에서 새가 날아가는 모습 등 해방감을 표현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프리(해방) 리비아’ ‘아웃 카다피’ ‘리비아 승리’ 등 각종 낙서와 희생자들의 명단들도 벽에 빼곡히 들어찼다. 카다피를 발로 차는 벽화가 그려진 곳을 히잡을 쓴 리비아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트리폴리=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아름다운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에서 전쟁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의 집중 공격으로 카다피 관저인 밥 알 아지지야와 무기고들만 피해를 봤을 뿐 민간시설 피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벽에 쓰여 있는 희생자들의 명단이나 도로 양편에 세워져 있는 ‘순교자 간판’들만이 상흔을 증언할 뿐이다.

왜 이렇게 낙서가 많은가라는 질문에 회사원 아흐무드 씨(40)는 “42년간 눈과 귀와 입에 족쇄가 채워졌던 시민들이 ‘이제 우리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며 “낙서와 벽화를 통해 일종의 치유의식을 치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집집마다 가게마다 내걸린 국기에 대해서도 그는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카다피 편이 아니라 시민군 편’이라는 일종의 방어 표시”라고 했다.

시민들은 기자가 ‘내전’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혁명’이라고 고쳐 말했다. 공항에서 만난 한 시민은 기자에게 “2월 17일 혁명 1주년 기념일을 꼭 봤어야 했다. 모든 리비아인이 촛불을 켜들고 밖으로 나와 밤새 노래 부르고 춤췄다.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모두 한가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거대한 감동 그 자체였다”고 전했다. 리비아 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최근 일부 외신에서 리비아의 분열을 거론하고 있지만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미 리비아는 하나다”라고 강조했다.

기자가 트리폴리에 도착한 첫날 시민들에게 카다피에 대해 물으면 “이미 끝났다”면서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기자와 낯이 익자 봇물 터지듯 카다피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분출됐다.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았는지 느껴졌다.

시계가게를 운영하는 아델 씨(35)는 “카다피 정권 42년 동안 리비아 국민은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한다는 의식이 박힌 공포의 날들을 보냈다. 1980년대에는 반정부 비판 발언을 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공개 총살하는 모습을 TV로 생중계하기도 했다”며 “회사 관공서는 물론이고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모두 감시원들이 있었다. 사무실마다 카메라가 달렸고 도청도 당연했다. 심지어 가족들도 믿을 수 없었다. 정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주변을 살펴야 했고 어떤 비판 의견도 제시할 수 없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리비아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해방감을 잘 모를 것”이라고 전했다. 외국 기자를 만나 카다피 이름을 언급하고 그 시절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우리가 해냈구나’라는 승리감을 느낀다고 했다.

리비아 혁명은 이런 공포정치에 대한 불만과 함께 아프리카 제1의 석유생산국(아프리카 전체 매장량의 49% 차지)인 부자 나라 리비아를 카다피가 다 망쳐 놓았다는 불만에서도 비롯됐다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다. 실제로 낙후한 공항시설에서부터 곳곳이 파인 도로, 우리나라 1960년대 판자촌을 연상시키는 흙집들은 이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만5000달러의 나라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교사 하자즈 씨는 “리비아 취업자의 절반이 경찰 교사 같은 공무원이다. 그런데 월급이 200디나르(약 160달러·18만 원)가 고작이다. 의사도 기껏 500∼600디나르 받는다. 장관의 월급도 1500디나르다. 석유가 있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는 모두 카다피 때문이라는 불만이 중산층에 팽배했다”고 전했다.

회사원 아슈라프 씨는 “리비아의 문제는 풍부한 자원을 한 사람이 독점했다는 데 있었다. 그(카다피)는 아프리카의 왕이 되겠다며 리비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 돈을 퍼주고 고등학교 때부터 군사교육을 시킨 젊은이들을 차드 우간다 내전에 참전시켜 희생시켰다”면서 “묵묵히 참아 오다 도화선만 있으면 폭발할 상황이었는데 옆 나라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무바라크까지 퇴진하자 자신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언론자유도 봇물이 터졌다. 경제문화프로그램 외주제작사로 정부 납품 일을 했다가 혁명 후 민영방송국으로 등록한 아팍 미디어에서 일하는 투아미 씨(29)는 “그동안 리비아 언론은 모두 카다피 통제하의 국영언론이었다. 하지만 혁명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은 과도정부 총리도 마음대로 욕할 수 있다. 혁명 후 트리폴리에서만 20여 개의 신문 방송국이 새로 생겼다”고 전했다.
▼ “민병대원 무기반납 저조… 툭하면 총기 사고” ▼
■ 그러나… 갈길 아직 멀어


해방 리비아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들의 총기 소지. 과도정부는 가구당 5, 6정씩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트리폴리 시내 곳곳에는 대공포를 실은 차량을 앞세우고 검문검색을 하는 민병대원들이 흔히 눈에 띈다. 트리폴리=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해방 리비아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들의 총기 소지. 과도정부는 가구당 5, 6정씩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트리폴리 시내 곳곳에는 대공포를 실은 차량을 앞세우고 검문검색을 하는 민병대원들이 흔히 눈에 띈다. 트리폴리=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비록 해방은 됐지만 리비아는 여러 면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총기 소지. 언제 어디서 총기사고가 날지 몰라 불안한 상황이다. 한 교민은 “얼마 전 교통사고 현장에서 화가 난 운전자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차에서 총을 꺼내 상대방 빈 차에 난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어젯밤에도 도심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현재 트리폴리 시민은 모두 총기를 휴대하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실제로 총기사고는 리비아 전역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 과도정부는 현재 가구당 5, 6정씩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반납을 권유하고 있지만 회수율은 저조하다.

그동안 카다피 정권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대신 물과 기름을 거의 공짜로 공급해 민심을 달랬다. 물 16L에 우리 돈 2000원, 기름은 L당 150원에 불과하다. 밀가루 값도 싸서 어른 팔 하나 정도 길이의 기다란 빵 7, 8개를 1000원이면 산다. 대학까지 무상교육에 의료도 무상이다. 하지만 경쟁이 없다 보니 교육이나 의료의 질은 낮은 편. 어떻든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혁명을 겪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무려 ―27.6%까지 떨어졌고 실업률은 30%까지 치솟았다. 물가가 올라 먹고살기는 팍팍해졌다. 해방됐다고는 하지만 긴장과 불안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성(城)은 무너졌지만 화약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단계라고 할까. 하지만 리비아인들은 “지금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몸은 비록 편안해도 마음은 감옥이었던 시절보다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은 천국인 ‘뉴 리비아’에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소중하지만 너무 많이 가져서 잊고 살았던 자유의 소중함을 리비아에서 발견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