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스물한살 한국 처녀에게 情을 나눠주던 곳… 나는 후쿠시마를 잊을 수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0일 03시 00분


日 대지진 공포 겪고도 두달만에 돌아가 정착한 주미선 씨

올해 4월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지방 방송사 공채에 당당히 합격한 주미선 씨. 일본 사람조차 후쿠시마를 떠나는 마당에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 씨는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리야마 시의 후쿠시마 방송사 옥상에서 포즈를 취한 주 씨. 후쿠시마 방송 제공
올해 4월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지방 방송사 공채에 당당히 합격한 주미선 씨. 일본 사람조차 후쿠시마를 떠나는 마당에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 씨는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리야마 시의 후쿠시마 방송사 옥상에서 포즈를 취한 주 씨. 후쿠시마 방송 제공
《 나는 스물두 살이다. 여자다.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한다. 그런 내가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고리야마(郡山) 시에 산다. 남들은 후쿠시마의 ‘후’자만 들어도 겁을 내는 원전 사고 지역 부근이다. 아침마다 신문을 펼쳐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방사능 수치에 안도와 불안이 교차한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건물을 흔들어대는 지진은 공포 그 자체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친구들도 나를 보면 미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나를 붙잡아두는 이 질긴 인연은 대체 뭐란 말인가…. 》
“머리로는 잊으려 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나 봐요. 조금만 흔들려도 1년 전 그 공포가 떠올라요.”

지난해 3월 11일 후쿠시마 현 이와키 시에 있는 동일본국제대 기숙사. 경제정보학부 졸업반이 되는 주미선 씨는 개학을 앞두고 취업 이력서를 작성 중이었다. 오후 2시 46분. 느닷없이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 순간에도 주 씨는 그 경보음이 앞으로 닥칠 대재앙의 전주곡임을 짐작조차 못했다.

1, 2분이 지났을까. 기숙사가 통째로 휘청거렸다. 책상을 잡고도 서 있을 수 없는 격렬한 흔들림이 이어졌다. 끝났나 싶으면 계속되는 지진이 10여 분이나 계속됐다. 일본 생활 3년, 웬만큼 지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후다닥 책상 밑으로 몸을 피했다. 책장의 책들이 쏟아졌고 침대 위의 스탠드가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 수밖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지진이 잦아들자 주 씨는 재빨리 건물 밖 운동장으로 튀어나갔다. 기숙사에 남아있던 학생 150여 명의 얼굴빛은 사색이었다. 대부분 혼자서 공포에 떨다 나와서 그런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살았구나 싶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 시간 후 쓰나미가 몰려왔다. 다음 날엔 후쿠시마 원전 1호기가 폭발했고 3호기 2호기 4호기가 줄줄이 폭발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학 측은 13일 학생들의 긴급 소개(疏開)를 결정했다. 버스 5대를 급하게 빌려 도쿄에 있는 다른 대학 기숙사를 물색해 피난작전에 돌입했다. 고속도로는 이미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도쿄에 가는 데 평소에는 2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이날은 무려 15시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교수님과 학교 직원들은 다시 그 버스로 귀향길에 올랐다.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잖아요. 본인들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데…. 하지만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먼저 챙겨줬어요.”

도쿄에 도착한 외국 학생들은 비행기표를 구하는 대로 하나둘 일본을 떴다. 주 씨도 지진 엿새 만에 가까스로 귀국에 성공했다.

[채널A 영상] ‘죽음의 땅’ 후쿠시마, 돌아오지 않는 난민

○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집으로 가면 편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포근한 침대에 누워도. 무기력하고 허탈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도 못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야 하나’… 답이 없는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작 주 씨의 마음을 짓누른 건 진로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모두들 위태롭게 살아가는 난장판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비겁한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의 지인들에게 부지런히 격려와 안부 전화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교수님, 친구들 그리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로부터 되돌아오는 말은 한결 같았다. “안전하게 피해 천만다행”이라는, “몸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다 또 만나자”라는 배려가 담긴 전화였다. 위로하려고 전화했다가 오히려 격려를 받는 꼴이 돼버렸다.

○ 가족처럼 돌봐주던 후쿠시마 사람들

2008년 3월. 미선은 기대와 설렘 속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멋진 유학생활을 하겠다는 의욕만큼은 넘쳐흘렀다. 하지만 썰렁한 기숙사에 들어섰을 때 몰려온 그 외로움과 막막함을 미선은 잊지 못한다. 뼛속까지 시린 을씨년스러운 추위와 낯선 시골의 대학 기숙사, 말 안 통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모든 게 새롭고 낯설기만 해 10대의 새내기 여대생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훈훈한 정을 느끼면서 꿋꿋하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먹을 것을 챙겨주던 기숙사 앞 상점 아줌마, 장학금을 주고 주기적으로 집으로 초대해 가족처럼 돌봐준 지역 로터리클럽의 아줌마 아저씨, 행여 외로울세라 기꺼이 말동무를 자처한 친구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화 가치가 폭락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미선의 학비 부담을 함께 고민했다. 모든 게 빚이었고 은혜였다. 이런 분들을 등지고 떠났다는 배신감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되돌아가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웃음을 잃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는 결국 미선의 일본행을 허락했다. 그분들에게 진 빚도 있지만 그렇다고 선뜻 되돌아갈 용기도 없던 미선. 엄마가 먼저 나서서 이끌어 준 것이다.

지난해 5월 22일. 미선은 ‘피난생활’ 2개월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들은 “다들 못 나와서 안달인데 미친 것 아니냐”며 만류했지만 미선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찾은 기숙사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겨우 몸만 빠져나오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학교로 되돌아온 친구들은 절반도 안됐다. 단짝이던 같은 과 한국 친구 2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이어졌고 방사능 수치도 높아 숨쉬는 것도 겁이 났다. 처음 한 달은 도저히 기숙사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도쿄의 친구 집에 머물며 수업이 있는 날에만 통학을 했다.

그러던 미선은 문득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묵묵히 자기 생활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분들을 배신하는 게 싫어 돌아와 놓고…. 이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미선은 도쿄 통학을 포기하고 완전히 이와키 주민이 되기로 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면서 완벽히 그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 ‘100 대 1’ 경쟁률 뚫고 후쿠시마 방송 입사

“미선, 일본에서 슈카쓰(就活·취업활동)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때?”

한 달쯤 지난 6월 어느 날 미선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미선의 학교생활과 학업을 돌봐주며 멘토 역할을 해온 교수님이 일본 기업 취업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대학교 3학년 2학기부터 슈카쓰에 돌입한다. 미선도 3학년부터 슈카쓰에 들어갔지만 지진 이후 포기했던 터였다.

‘그래 다시 해보는 거야.’

온라인 채용사이트에 접속해 취업정보를 모으고, 구미가 당기는 회사 수십 곳에 이력서도 넣었다.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매스미디어에 관심이 많던 미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7월 후쿠시마 방송에서 채용공고가 난 것. 하지만 외국인이 일반 회사도 아닌 방송사에 취직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명 채용에 전국에서 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서류심사 필기시험 그리고 3차례의 면접 끝에 미선은 지난해 9월 당당히 합격통지서를 거머쥐었다. 후쿠시마 방송이 외국인을 채용한 것은 개국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신입사원 채용을 총괄한 사토 요시무네(佐藤吉宗) 총무부장은 미선에 대해 “밝고 긍정적이다. 일본 학생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면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온라인, 컴퓨터 시대라고 해도 방송은 사람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본. 미선은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시키는 대인관계 면에서 탁월한 잠재력이 있다는 게 평가위원들의 공통의견이었다고 한다.

미선은 4월부터 후쿠시마 방송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지방 방송사는 종합직으로 채용한 직원이 여러 부서를 경험하게 한다. 미선도 보도본부와 방송제작 등을 거칠 예정이다.

“일본에도 물론 나쁜 사람이 많아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과거를 못 본 체하려는 비양심도 있고 이웃나라를 침략한 과거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대표적이죠. 그런 사람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욱’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국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동일본 대지진 때 ‘방사능이나 실컷 마셔라’며 철없는 글을 올린 사람도 있지만 이웃나라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도우려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처럼…”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미선의 꿈은 소박하다.

“밖에서는 위태롭게 보이는 후쿠시마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같이 아파하는 외국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정이고 의리인 것 같아요.”

고리야먀=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日 대지진#후쿠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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