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제징용에 고통받다 67년 전 태평양에 넋을 묻은 한국인 수천 명의 유해 발굴작업이 처음으로 시도됐다.
1945년 광복 직후 한국인 징용자 수천 명을 태우고 귀국길에 올랐다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한 ‘우키시마(浮島)호’ 희생자 유족들은 29일 사고 해역에서 유해 발굴에 나섰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회장 한영용)에 따르면 한 회장과 이 사건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일본 당국의 사전 허가를 받고 이날 교토 마이즈루(舞鶴) 항 부근의 우키시마호 침몰 현장에서 한국인 잠수부 2명을 동원해 유해와 선체 잔해 발굴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폭우가 내리는 악천후로 시계가 불량한 데다 바다 밑바닥이 뻘이어서 단서를 찾는 데 실패하고 오후 5시경 철수했다.
유족회는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당시 건져내지 못한 유해가 아직도 바다 진흙 속이나 바위틈에 끼여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많다”며 “구천을 헤매는 영혼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유해 발굴을 시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45년 우키시마호(4730t) 폭침사건 직후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해저 기뢰를 건드려 침몰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했고, 승선자 7500∼8000명 중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사고 후 수년간 선체를 인양하거나 유해를 회수하지 않아 의혹을 키웠다.
생존자와 유족들은 1992년 일본 정부의 안전관리 의무 위반을 문제 삼아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2004년 패소가 확정됐다. 한국 정부도 2005∼2010년 진상 조사를 벌였지만 자료 부족으로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다.
:: 우키시마(浮島)호 폭침사건 ::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22일 일본 아오모리 현의 군사시설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한국인 노동자와 가족을 태우고
한국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24일 교토 인근의 마이즈루 항에 기항하려다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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