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리 절단 팡정 씨 “전속력 돌진 탱크 앞 여학생 밀쳐내고 나는 깔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5일 03시 00분


■ 양다리 절단 팡정 씨의 ‘톈안먼’
후야오방 前총서기 사망이 발단… 추모 대자보→민주화 요구 이어져
軍, 광장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베이징(北京) 톈안먼 광장에 집결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중국 정부가 군을 동원해 진압한 사건이다. 발단은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공산당 전 총서기의 사망에서 비롯했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후계자로 등극한 후 전 총서기는 덩의 주문과 달리 민주화 노선을 지향하다 실각한 뒤 사망했다. 베이징 대학가에 그를 추모하는 대자보가 등장했고, 4월 17일 톈안먼 광장에서 첫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항거에 시민이 가세하면서 5월 17일 100만여 명의 시위대가 톈안먼 광장에 집결했다. 그러자 리펑(李鵬) 총리가 5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 20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을 포위했다.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 사이 탱크를 앞세운 4만 명의 군 부대가 마침내 시내로 진입해 톈안먼 광장에 있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당시 대학 육상선수였던 팡정(方政) 씨는 “(톈안먼 인근) 창안(長安)가에서 시위를 하던 중 한 여학생이 탱크가 몰려오는 길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인도로 밀쳐냈지만 나는 미처 탱크를 피하지 못했다”며 “의식을 잃기 전 다리가 잘리고 뼈가 드러나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베이징에 들어온 탱크는 전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질주했다”고 회고했다. 팡 씨는 2009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지난주 톈안먼 23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들어왔다.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대는 집회와 언론의 자유 등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 보장을 요구했고 관료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비난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누적된 불평등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는 특히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을 19세기 말 청조의 부패를 초래한 서태후와 비교하는 등 정권교체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해 4월 26일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사설에서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된 음모”라며 시위대를 향한 덩의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1990년 중국 공안부는 톈안먼 사태의 민간인 희생자는 875명, 부상자는 1만4000여 명이라고 국무원에 보고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사망자만 5000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군에 의한 학살은 톈안먼 광장보다 베이징 시내와 근교에서 주로 이뤄졌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달 31일 미국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중미대화기금은 톈안먼 사태로 투옥됐던 1000여 명 가운데 10여 명이 23년이 지난 지금도 교도소에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중에는 이미 일흔을 넘긴 장야췬(江亞群·73) 씨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톈안먼 사태 직후 당국이 수배령을 내린 학생 지도자 21명 중 중앙민족학원 출신 3명은 아직 행방이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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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톈안먼 사태#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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