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앙숙’ 러-폴란드 축구팬 유혈충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4일 03시 00분


‘유로 2012’ 양국경기 앞두고 바르샤바 가두행진 러 응원단 폴란드 팬들이 습격
15명 부상… 지배-피지배 악연 ‘예견된 사고’

유로 2012의 A조 예선 러시아와 폴란드 경기를 앞두고 개최국인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곳곳에서 양국 축구팬들이 난투극을 벌였다. 소련시절 위성국가로 짓밟혔던 구원(舊怨)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2일 러시아 축구팬들 5500여 명이 바르샤바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던 도중 폴란드 청년들의 공격을 받아 충돌이 빚어졌다고 로이터통신과 러시아 뉴스 채널 러시아투데이(RT) 등이 12일 보도했다. 응원을 위해 원정 온 러시아 축구팬들은 이날 옛 소련연방이 무너지고 러시아공화국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러시아의 날’을 맞아 경기가 열리는 국립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에 가까워질 무렵 포니아토프스키 다리에서 폴란드 청년 100여 명이 행렬에 달려들면서 순식간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은 이들을 제지하기 위해 물대포를 쏘고 고무탄과 최루탄을 발사했고, 폴란드 청년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충돌로 러시아인을 포함해 최소 15명이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고, 난투극에 가담한 양국 축구팬 123명이 경찰에 체포됐다고 CNN은 13일 전했다.

▲동영상=‘동유럽 앙숙’ 러-폴란드 축구팬 유혈충돌

러시아 축구팬들은 평화행진을 약속했는데도 폴란드 청년들이 갑자기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 시민들은 “러시아 축구팬들이 옛 소련기를 앞세워 행진한 것은 도발 행위나 다름없다”며 비난했다고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이날 바르샤바의 한 카페에서도 복면을 쓴 50명의 폴란드인이 러시아 축구팬을 향해 돌과 연막탄을 던지며 공격했다.

식민 역사와 정치적 악연으로 점철된 두 나라의 이번 사태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슬라브족인 양국은 각각 966년 가톨릭(폴란드), 988년 그리스 정교(러시아)를 국교로 삼아 불화의 씨앗을 키워왔다. 17세기 초 리투아니아와 연방국을 구성한 폴란드는 러시아를 침략해 모스크바를 직접 통치한 적도 있지만 1795년 강대국으로 자라난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소련에 국토를 분할 점령당했다. 1940년 옛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군 장교와 경찰, 대학교수, 성직자, 의사 등 약 2만2000명을 사살하고 암매장한 ‘카틴 숲 학살 사건’은 폴란드인이 분노하는 대표적 사건이다. 러시아는 옛 소련이 자행한 만행임을 뒤늦게 인정하면서도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폴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하려는 체첸반군과 그루지야를 지원하고 있어 양국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날 양국 간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장에는 ‘폴란드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암살당했다’는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 2010년 4월 10일 카틴 숲 학살 70주년을 맞아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리들이 추모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공항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 탑승객 96명이 전원 사망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러-폴란드#유혈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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