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권이 소비세 인상안에 전격 합의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재정건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따른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마지막 선택의 순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쟁’보다는 ‘큰 정치’를 선택했다. 아사히신문은 ‘의사(擬似) 대연립’이라는 표현으로 극적 합의에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17일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 참석차 멕시코로 출국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20일 오전 귀국하는 대로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자민당 총재,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공명당 대표와 만나 소비세 인상안에 정식 합의할 예정이다. 이어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21일까지 중의원에서 소비세 인상안을 통과시킨 뒤, 참의원에서의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 회기를 8월 말이나 9월 초까지 연장할 방침이다.
이에 앞서 15일 여야 실무진은 소비세 증세를 둘러싼 쟁점을 정리해 공동 수정안을 마련했다. 주된 내용은 현행 5%인 소비세율을 2014년 4월에 8%, 2015년 10월에 10%로 올리며 이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지는 저소득층에게는 현금을 나눠준다는 것이다. 대신 민주당은 총선 때 내걸었던 최저보장연금제 및 75세 이상 후기고령자 무상 의료보험 실시 공약과 관련해 여야가 함께 꾸리는 ‘사회보장제도개혁 국민회의’에서 추후 대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사실상 공약 폐지에 동의한 것이다.
소비세 인상안 타결은 재정건전성 악화라는 벼랑 끝에 몰린 국가위기에 압박감을 느낀 여야 영수의 결단으로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다 총리는 소비세 인상안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며 당 정체성과 직결되는 핵심 공약을 사실상 포기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 실무협의 타결 전날인 14일에는 다니가키 총재와 두 차례 통화하며 설득 작업에 매달렸다. 최근 일본 정계에서는 보기 드문 추진력이었다.
다니가키 총재도 민주당의 복지공약을 즉각적으로 백지화하라던 요구에서 한발 물러나 “대안을 추후 논의한다”는 수준으로 양보했다. 노다 총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완전 항복을 받아내면 민주당 내 중간파까지 소비세 인상 반대로 돌아서 법안 통과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다니가키 총재는 16일 도쿄 시내 가두연설에서 “자민당 시절에 많은 나랏빚을 남기고 말았다. 미래 세대에 빚을 갚으라고 해서는 면목이 안 선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국’에는 초대형 후폭풍이 예상된다. 민주당은 18일부터 정책조사회 합동회의를 열어 당내 추인절차를 밟을 예정이지만 120여 명에 이르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대표 그룹은 “총선 공약이 모두 깨졌다”며 반발하고 있다. 오자와 그룹이 중의원 표결 과정에서 반란표를 던질 확률은 적지만 표결에 불참하는 형태로 불만을 표시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징계처분 수위를 놓고 당내 갈등이 격화돼 여당이 분열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니가키 총재가 소비세 인상안에 합의한 배경 중 하나도 이러한 분열을 노렸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정계 일각에서는 노다 총리가 9월 대표 선거 직전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를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오자와 아이들’의 무더기 낙마가 예상되는 총선을 조기에 실시해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의 영향력을 떨어뜨리는 한편 자민당과의 연대를 통해 일본 정계의 새판을 짠다는 것이다. 노다 총리와 가까운 와타나베 고조(渡部恒三) 민주당 최고고문은 “오자와 선생. 부디 (소비세 인상안에) 반대해 주시오. 국회는 말끔하게 정리돼 좋아질 것이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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