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도 공략 못한 난공불락 美 애니 시장, 한국 고졸감독이 점령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30일 03시 00분


‘코라의 전설’로 美 케이블TV서 돌풍 유재명 대표

‘코라의 전설’ 포스터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유재명 대표. 스튜디오 미르 제공
‘코라의 전설’ 포스터를 배경으로 활짝 웃는 유재명 대표. 스튜디오 미르 제공
4월 중순 직원이 보고서를 들고 왔다. ‘미국 전체 케이블 프로그램 시청률 4위’라고 적혀 있었다. 어린이 프로그램 중에는 1위였다. “드라마, 스포츠, 쇼 프로그램을 제치고 10위 안에 들다니….”

한국 제작사가 기획,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받아든 초유의 성적표였다. 미국 친구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어메이징한(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4월 14일 니켈로디언 채널에서 첫 전파를 탄 ‘코라의 전설(The legend of Korra)’이 첫 주에 거둔 성적이었다. 제작사인 ‘스튜디오 미르’의 유재명 대표 겸 총감독(40)은 이상하게도 눈물 대신 땀이 났다. 기쁨에 과거의 아픔이 겹쳤다.

1989년 겨울,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고3 수험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꿈은 서양화가였다. 어머니가 집을 내놓았다. 집을 보러 온, 당시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의 대표적 회사였던 에이콤 간부의 시선이 벽에 붙은 고교생의 그림에 멎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채용을 제안했다. 얼마 뒤 취업했다.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대졸 초임이 월 100만 원이 안 되던 시절, 첫 월급봉투에 200만 원이 담겨 있었다.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23년간의 애니메이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2년부터 경기가 나빠졌다. 이직을 생각했지만 ‘감독은 해보고 그만두자’고 다짐했다. 1999년 소니픽처스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해 미국에서 방영된 ‘빅가이’로 감독 데뷔했다.

‘코라의 전설’은 물, 불, 흙, 공기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4대 종족의 영웅담을 그린 판타지 애니메이션. 이 프로그램을 방영한 니켈로디언은 미국 굴지의 어린이 전문 케이블 채널이다. ‘스펀지 밥’ ‘쿵푸 팬더’ 등을 제작한 대표적 애니메이션 제작사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디즈니에 밀려 업계 1위 자리를 내준 니켈로디언은 야심작이 필요했다. 그때 이 회사 간부가 ‘원더풀 데이즈’(2003년)를 봤다. 유 대표가 ‘키(key) 애니메이터’를 맡았던 작품이다. 그는 작품의 미장센(영상미)에 매혹됐다. 2005년 ‘더 라스트 에어벤더 아바타’의 제작을 주문해 인연을 맺었다. 니켈로디언은 유 대표의 실력을 인정해 ‘코라의 전설’의 스토리 원안을 제외한 전권을 맡겼다.

유 대표의 성공 뒤에는 미국 시장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었다. 국내 대표적 애니메이션 ‘뽀로로’나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도 미국 시장만은 난공불락이었다. 미국인의 감성 코드를 집중 연구했다. 영웅담의 주인공은 음해를 당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동료 여성의 실수를 감싸주는 신사로 설정했다.

‘코라의 전설’은 23일 누적 시청자 수 3700만 명을 기록하며 13회로 막을 내렸다. 최근 3년간 니켈로디언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중 가장 좋은 성적이다.
회사의 주가는 높아졌지만 유 대표는 요즘 불안하다. 직원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에 애니메이션 학과가 수십 곳이지만 지원자가 많지 않다. 얼마 전 방문한 미국 애니메이션의 산실 캘리포니아예술대(칼아츠)에는 한국 학생이 넘쳐났다. 그는 “이들이 현장보다 학위만을 좇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다.

스튜디오 미르는 최근 소니픽처스로부터 ‘분덕스 시즌4’의 제작을 의뢰받았다. 애런 맥그루더 작가가 뉴욕타임스에 연재했던 동명의 인기 네 컷 만화가 원작이다. 유 대표는 “이제 미국 성인들을 공략하러 간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진행형이다.

[채널A 영상]뽀로로의 아버지를 만나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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