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탐사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한 닐 암스트롱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암스트롱은 버즈 올드린 달착륙선 조종사와 함께 ‘이글’호를 타고 달에 내렸다. 새턴-V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지 3일 만에 달 뒤편에 도착했고 이어 달을 13바퀴 돈 뒤 목표지점에 안착했다. 텍사스 휴스턴의 본부 컴퓨터에선 아폴로 11호의 연료가 곧 바닥날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 연출됐다. 암스트롱은 본부와 역사적인 첫 교신을 했다.
“휴스턴, 이곳은 ‘고요의 바다’다. 이글호가 착륙했다.”(암스트롱)
“알았다. 고요의 바다, 교신 확인했다. 여기는 모두 사색이 돼 있었다. 숨 돌리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휴스턴)
이윽고 하얀 우주복에 헬멧을 쓴 암스트롱이 착륙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달 표면에 내렸다.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one giant leap)”이라고 말했다.
이어 올드린이 암스트롱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달의 낮은 중력 때문에 마치 캥거루가 뛰는 것처럼 팔짝팔짝 달 표면을 뛰어다녔다. 당시 사령선에 타고 있던 마이클 콜린스는 착륙선 60마일(약 96.6km) 상공에 머물며 이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약 2시간 10분간 달 표면을 밟으면서 TV 카메라와 과학 장비를 설치하고 암석 조각을 채집했다. 이때부터 1972년까지 미국은 아폴로 17호까지 발사했고 암스트롱을 포함해 모두 12명의 우주인들이 달을 밟았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우주 개척 경쟁에서 옛 소련에 뒤졌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인류에게는 우주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 TV를 보유한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람들이 넋을 잃고 사상 초유의 우주 쇼 중계를 지켜봤다.
암스트롱은 1930년 8월 5일 오하이오 주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은 주 회계감사원이었다. 암스트롱은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 주 소도시를 여러 곳 옮겨 다니며 유년기를 보냈다. 6세 때 아버지와 함께 민간수송기 포드 트라이모터를 처음 타본 뒤 비행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이글 스카우트’에 가입해 활동했고 퍼듀대에서 해군 장학금을 받고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6·25전쟁에 참전해 78차례 전투비행 임무를 완수하고 1952년 8월 제대했다. 그는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6·25전쟁에서 임무를 마친 뒤 퍼듀대로 돌아와 1955년 졸업장을 받았다. 서던캘리포니아대 항공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 항공우주국(NASA) 전신인 항공자문위원회(NACA) 조종사로 발탁됐다.
1962년 NASA가 선발한 제2기 우주비행사 9명에 포함돼 1966년 제미니 8호의 선장으로 첫 우주비행을 했다. 아폴로 11호 선장으로 달에 착륙한 뒤 지구로 돌아온 그는 본부 항공기술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다가 1971년 NASA에서 퇴직했다. 1972년부터 8년간 신시내티대 항공공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으며 뉴욕 AIL시스템 등 몇몇 회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암스트롱은 올해 5월 호주에서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는 “당시 달 착륙에 성공할 확률은 50% 정도, 달 탐사 이후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확률은 90%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NASA에 대한 미 정부의 관심이 1960년대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라며 “NASA는 젊은이들의 진취적 열망을 고무하는 가장 성공적인 공공기관이었다”고 말했다. 달 착륙이 조작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달에 가서 내가 남겨두고 온 카메라를 가져올 것”이라고 답했다.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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