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 미사를 지켜보기 위한 인파의 물결이 교황청 주변의 대로를 모두 점령했다. 교황청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 동쪽 성벽의 리소르지멘토 광장, 정문 앞의 치타레오니나 광장, 서쪽의 델우피지오 광장은 모두 교통이 통제됐다. 이들 광장 곳곳에는 즉위 미사가 열리는 성 베드로 광장에 입장하지 못한 신도들을 위해 대규모 전광판이 마련됐다. 광장마다 경찰차 수십 대와 경찰 수백 명이 만일의 사건 사고에 대비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 강론 도중 쏟아진 박수
리소르지멘토 광장에서 아르헨티나 국기를 들고 있던 대학생 마누엘 발데스 씨는 “즉위 미사 시작 2시간 전에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갔는데 아쉽게도 자리가 꽉 차 들어갈 수 없었다”며 “그래도 멀리서나마 화면을 통해 지켜볼 수 있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오전 8시 45분(한국시간 19일 오후 4시 45분)경 숙소인 ‘성녀 마르타의 집’을 출발한 교황이 무개차를 타고 성 베드로 광장에 나타나자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길 사이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벽부터 기다리던 수십만 명의 인파를 향해 20여 분 동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차에서 내려 주변에 있던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병자(病者)에게 축복을 내리기도 했다. 이날 성 베드로 광장 주변의 대로 등 바티칸에 최대 10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현지 언론이 추산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가 제대(祭臺) 밑에 자리한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에 나아가 예를 표함으로써 교황 직에 임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 광경은 광장 전면 중앙과 좌우에 마련된 4개의 초대형 전광판을 통해 생중계됐다. 교황이 오전 9시 40분경 성직자들과 함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자 수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숨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침묵 속의 경건함 그 자체였다. 주교관을 쓴 교황이 대성당 앞에 마련된 제대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엄숙한 강론 도중에는 처음부터 박수가 계속 이어졌다.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강론 서두에 “교황 직을 시작하는 미사를 교회의 수호성인인 성 요셉 축일에 거행하게 됐는데 우연히도 제가 공경하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세례명(요제프 라칭거)과 같다. 우리는 기도와 사랑으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곁에 가까이 있다”고 말하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어린이와 노인, 연약한 이들, 우리 마음의 변두리에 머무는 모든 이를 사랑으로 수호해야 한다”, “교황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수호하기 위해 사랑과 다정함으로 약한 이들을 지키겠다” 등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할 때마다 신도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이날 성 베드로 광장에서 공개된 신임 교황의 상징물인 ‘팔리움’(교황과 대주교가 명예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어깨에 걸치는 양털 띠)과 교황의 반지인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청빈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교황이 장루이 토랑 수석부제추기경의 도움으로 제의 위에 두른 팔리움은 자신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 사용한 것과 거의 비슷했으며 문양이 단순했다. 다만 방패 위에 있는 추기경을 상징하는 모자가 주교관으로 대체되고 교황을 상징하는 열쇠가 추가됐다. 문장 아래에는 대주교 시절 쓴 것과 같은 ‘자비로서 부름받았다’는 의미의 ‘miserando atque eligendo’가 그대로 사용됐다. 안젤로 소다노 수석추기경이 끼워 준 어부의 반지는 원래 금으로 만드는 데 이번에는 도금한 은반지였다.
이날 강론은 이탈리아어로 진행됐으며 교황은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아랍어 스와힐리어 중국어 등 5개 언어로 기도했다. 미사는 교황이 신자들에게 손을 들어 강복하는 파견 예식으로 끝났다. 뜨거운 태양이 계속 내리쬐던 2시간 내내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던 신도들은 미사가 끝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가자 아쉬움 속에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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