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4일 인도 뉴델리에서 경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중국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중국과 일본은 숙명적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소 부총리는 “중국은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동중국해와 일본해(동해의 일본식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자신의 영토는 스스로 지킨다는 개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5년 외상 시절 역사 교과서 문제로 중-일 관계가 나빠졌을 때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우려의 뜻을 전달하자 “최근 1500년간 계속 사이가 나빴으니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소 부총리의 머릿속에는 중-일은 ‘화해’보다는 ‘충돌’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중국과 일본이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공격당한 점에서 일본 국민도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양국의 공식 관계는 일본이 서기 600년에 견수사(遣隋使)를 중국에 보냈을 때 시작됐다. 아소 부총리가 언급한 ‘1500여 년’은 바로 이 시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견수사는 수나라에 파견된 조공 사절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오는 역할을 했다. 초창기엔 일본이 중국에 한 수 배우고자 한 것.
중국 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대규모 병력으로 일본 침공에 나선다. 화약을 사용한 새로운 병기로 일본 측이 수세에 몰렸지만 두 차례 모두 폭풍우 덕에 원나라 병력이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게 된다. 당시 막부는 일본을 구한 이 폭풍우를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일본의 반격도 시작된다. 14세기 원이 쇠퇴하고 명이 들어서는 혼란기에 일본 해적(왜구)들이 수시로 중국 연안을 약탈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 정벌을 명목으로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한 힘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1894년 6월부터 약 1년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청나라 주력 북양함대는 일본에 대패했다. 문화 중심지이자 아시아의 대국인 중국에 승리한 일본인들의 감격은 대단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청일 강화조약(일명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일본은 그 감격을 기념하기 위해 야마구치(山口) 현 시모노세키(下關)의 조약 체결 현장을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아시아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중-일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일본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한 뒤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1937년에는 중국 난징(南京)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난징대학살’을 벌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중-일 간 힘의 관계가 다시 역전되는 모습이다. 중국은 국방비 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리며 해양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매년 만주사변 관련 행사를 열고 ‘과거의 치욕’에 대한 설욕을 다짐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인민해방군 기관지 제팡(解放)군보는 1면에 “오늘의 중국은 ‘9·18사변(만주사변)’ 또는 갑오전쟁(청일전쟁) 때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경고하며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중국이 힘이 커지자 일본은 ‘순방 외교’로 우군을 모으고 있다. 일본의 황금 연휴인 ‘골든위크’(4월 27일∼5월 6일)를 맞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아소 부총리는 해외를 순방했다. 아베 총리는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를, 아소 부총리는 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순방국 대부분이 중국의 위아래에 있어 사실상 중국을 포위했다.
아소 부총리가 인도 방문 때 “동중국해로 해군력을 확장하는 중국에 맞서 영토를 지키자”고 말할 정도로 일본은 노골적으로 중국 포위를 위한 국가적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중-일 관계 개선의 여지가 단기간에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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