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고노담화 부정 본색 드러내 “軍-관헌이 위안부 강제 연행 지시한 정부자료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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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 가미 의원 질의-내각 답변서 입수

고노 담화에 대한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답변서. 옆줄 친 부분은 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로 “1993년 8월 조사 결과(고노 담화)를 발표할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헌에 따른 (위안부) 강제 연행을 직접 지시하는 기술은 없었다”고 돼 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고노 담화에 대한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답변서. 옆줄 친 부분은 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로 “1993년 8월 조사 결과(고노 담화)를 발표할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헌에 따른 (위안부) 강제 연행을 직접 지시하는 기술은 없었다”고 돼 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속 부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본보가 9일 입수한 가미 도모코(紙智子) 참의원 의원의 질의서와 내각 답변서에서 드러났다. 질의서는 A4용지 3장(1825자), 답변서는 1장(585자) 분량이었다. 답변서는 각의 결정을 거쳐 아베 총리가 서명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군과 관헌(官憲·관청의 의미)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해 정부 견해를 분명히 밝혀 달라’는 가미 의원의 질의에 아베 정부는 “1993년 8월 조사 결과(고노 담화)를 발표할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헌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직접 지시하는 기술은 없었다”고 밝혔다. 강제 연행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가미 의원은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 구이린(桂林)과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과 네덜란드 여성을 성폭행한 뒤 위안부로 삼았다는 진술을 담은 도쿄전범재판 증거 자료를 거론하며 “정부는 고노 담화 발표 전후에 이 같은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이 문서는 일본 법무성이 보관하다가 1999년 국립공문서관에 넘겨졌다.

이에 대해 아베 정부는 답변서에서 “이 문서들은 법무성에 보관돼 있었지만 내각관방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1993년 8월 고노 담화를 발표할 당시 내각관방에 도쿄전범재판 자료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후 제시된 강제동원 증거를 외면해 왔다는 점을 스스로 털어놓은 셈이다.

가미 의원은 질의서에 ‘문서나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안부 16명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본인 의사에 반대해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고노 담화를 발표하게 됐다’는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 전 관방부(副)장관의 발언도 적시했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앞부분만 강조하면서 고노 담화의 실제 의미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가미 의원실 측은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 계승 여부에 대해 애매하게 답해 왔지만 결국 계승을 부정하고 있다. 올해 7월 참의원 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고노 담화 수정 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아베 총리는 1월 말 “(고노 담화) 문제를 정치, 외교 쟁점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당시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에 (현재) 관방장관이 대응하는 게 적절하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모호하게 말했다. 반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며 고노 담화를 인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의 정의와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침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답변안을 준비했지만 아베 총리는 이를 읽지 않았다고 아사히신문이 9일 보도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고노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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