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쇼크]“추경 등 부양책 효과 반감… 경기회복 발목”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1일 03시 00분


한국경제, 美출구전략 후폭풍

5년 전 응급수술을 받았던 환자는 이후 진통제에 의지해 살았다. 그 효과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온 게 문제였다. ‘양적완화’와 ‘제로금리’는 언제까지나 이어질 당연한 축복으로 느껴졌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그 달콤했던 주삿바늘을 빼내려 하자 세계경제가 일제히 혼돈에 빠진 모습이다. 튼튼한 기초체력 없이 풍부한 유동성에만 의존해 온 상당수 신흥국이 제일 먼저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상대적으로 외환사정은 넉넉하지만 장기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이런 상황은 분명히 악재다. “진통제가 필요 없는 걸 보면 건강을 회복했다는 뜻 아니냐”는 낙관적인 해석도 있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당분간 대규모 이탈과 쏠림으로 극단적인 불안심리를 노출할 개연성이 크다.

○ 신흥국 경제에 치명타 될 수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화 자금의 이탈로 이어지며 금융시장에 ‘1차 충격’을 준다. 특히 외국인 투자비중이 높은 일부 신흥국은 미 연준의 정책 방향에 따라 환율과 주가가 급등락하는 등 시장불안이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양적완화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던 신흥국들에 미국의 출구전략은 ‘발등의 불’이나 마찬가지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최근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거나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한 나라들이 출구전략 위험에 특히 취약하다”며 “이들 국가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 중 일부가 위기 상황에 빠지면 주변 국가에도 전염 효과를 주면서 시장의 공포가 순식간에 확산될 수 있다.

○ 자산가치 하락, 기업부담 증가 우려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3200억 달러가 넘고, 경상수지 흑자도 1년 이상 지속된 점을 감안할 때 다른 신흥국보다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한동안 이어진 외국인 자본유입의 흐름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으면서 국내 자산가치가 급락할 공산이 크다.

실물경제는 더 걱정이다. 출구전략이 본격화되면 시장금리가 올라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던 국내 경기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현재 상황에서 금리가 오르면 한계 기업들의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고, 가계부채 부담이 늘어 소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추가경정예산이나 부동산 대책 등 그간의 경기부양책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에는 특히 양적완화의 축소가 큰 위기가 될 수 있다. STX그룹의 구조조정으로 해운 조선 건설 등 ‘3대 취약업종’에 속한 대기업이 발행한 채권이 잘 유통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적완화 축소라는 메가톤급 충격이 덮침에 따라 해당 기업 채권의 금리는 더 상승(채권가격은 하락)할 수 있다. 채권을 발행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 대기업의 자금난이 가중되는 구조다. 은행 대출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은 신용경색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출구전략 공포로 하반기 세계경제가 또다시 ‘시계 제로’ 상태가 되면 기업들이 투자 일정을 미루면서 경기 반등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게다가 금융시장 불안이 신흥국 경제를 망가뜨릴 경우 한국의 수출시장이 좁아질 수도 있다.

○ 정부 “세계경제가 회복됐다는 증거”

양적완화 축소를 하반기(7∼12월) 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으로 꼽았던 정부는 막상 연준의 발표가 현실화되자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미 예상했던 일’로 다음 주 발표할 하반기 경제전망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미 상황별로 시나리오를 다 짜놓고 대비해온 일이기 때문에 성장률 전망을 내릴 만한 변수는 아니다”라며 “오히려 미국이 ‘질서 있게’ 출구전략을 해준다면 그만큼 자국 경제가 좋아졌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한국에는 ‘굿 뉴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의 출구전략으로 엔화가치가 올라 ‘아베노믹스’로 인한 피해를 한 방에 만회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정부는 출구전략에 대한 공포가 시장의 과민반응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각종 대응방안을 면밀히 모색하기로 했다. 우선 외국인 자금의 유·출입 상황을 봐 가며 ‘거시건전성 3종 세트’ 규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금융당국도 다음 주 긴급 금융시장 점검회의를 열고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따른 파장과 대응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세종=유재동 기자·홍수용·문병기 기자 jarrett@donga.com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Federal Reserve System)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을 합친 것입니다. 본보는 그동안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최고기구인 FRB를 ‘미국 중앙은행’ 개념으로 사용했으나 미국 정부의 공식 표기와 현지 언론의 용례를 받아들여 미국 중앙은행을 ‘연방준비제도(Fed)’로 적습니다.
#한국경제#경기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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