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Yes, she can” 힐러리 신드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2일 03시 00분


美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때이른 신드롬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힐러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3년 반이나 남은 차기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도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009년 1월 13일(현지 시간) 열린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국무장관 인준청문회에서 힐러리가 현안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DB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힐러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3년 반이나 남은 차기 미국 대선에 대한 관심도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009년 1월 13일(현지 시간) 열린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국무장관 인준청문회에서 힐러리가 현안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DB
“클린턴이 온다. 집결하라.”

4월 29일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지지자들에게 짧은 번개모임 메시지가 떴다. 기자는 부리나케 행사 장소인 워싱턴 시내 K스트리트의 해밀턴 크라운 플라자 호텔 앞으로 갔다. 어둠이 깃드는 오후 6시 무렵 힐러리의 열성 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각자 플래카드도 하나씩 챙겨 들었다. 호텔 밖에 모여 힐러리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정작 호텔 안에서는 힐러리가 아닌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비공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날 힐러리 지지 모임을 조직했다는 조지워싱턴대 2학년생 에이버리 재프 씨(20)에게 ‘빌의 행사에까지 쫓아다니느냐’고 물었다. 한술 더 떠 “딸 첼시가 가는 곳에도 출동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슈퍼팩(정치행동위원회) ‘레디 포 힐러리’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힐러리 지지자를 모으고, 캠페인 기금을 적립하고, 힐러리 가족이 등장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힐러리를 대통령으로”를 외친다. 이 단체는 올 1월 25일 버락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닷새 만에 발족했다. 다음 대선까지는 3년 반이나 남았지만 힐러리 대선 캠페인은 벌써 진행되고 있다.

가장 어려 보이는 고등학생 윌버 군(16)에게 힐러리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2008년 대선 민주당 경선 때도 힐러리 캠프에서 봉투 접는 자원봉사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머리가 희끗한 주디 벡 씨(63)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자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골든 걸’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골든 걸’은 60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1990년대 TV 시트콤 제목이자 요즘 힐러리에게 자주 따라붙는 별명이다.

요즘 그 어떤 미국의 정치인도 힐러리만큼 화제를 몰고 다니지 못한다. 현직 정치인도 아니고 대권 도전 의사를 분명히 밝힌 적도 없지만 힐러리는 가히 태풍의 핵이다.

힐러리를 롤모델로 삼는 여성계는 벌써부터 ‘힐러리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다걸기)한 분위기다. 유명 여성단체 ‘에밀리스 리스트’는 지난달 ‘마담 프레지던트’ 프로젝트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 단체의 스테파니 슈리오크 회장은 “2008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가 패한 것은 뼈아픈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후 국무장관을 잘 해내 다음 대선에서 그 어느 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들떠 있다. 워싱턴에 있는 이 단체 본부 사무실에는 힐러리가 출마할 경우 승리 가능성을 지역별로 보여주는 ‘힐러리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 지도가 벌써 붙어 있다.

▼ 못말리는 인기… 지지단체, 그녀뒤 졸졸… “딸 가는 곳도 출동” ▼

여론조사 단체들은 힐러리 지지율을 주 단위로 발표한다. 힐러리가 공식석상에 등장하면 톱뉴스가 된다. ‘빌의 바람기에 질린 힐러리, 이혼 결심’ 같은 제목의 믿거나 말거나성 뉴스가 선정적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대형 서점에 꽂혀 있는 힐러리 전기만도 20여 권에 이른다. 힐러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도 있다. 최근 타임지가 지적했듯이 미국은 ‘힐러리 열풍(fever)’에 휩싸여 있다.

한국에도 힐러리 팬은 많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은 처음 힐러리가 대통령 부인이 됐을 때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혼자 힘으로 정치에 입문한 것도 아니고 남편 덕에 주목받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남편 그늘에 있지 않고 점차 독자적 행보를 넓혀 나가는 것을 보고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존 대통령 부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정치 영역을 개척해 전문성을 쌓았다. ‘퍼스트레이디로 너무 튄다’는 여론에 당당히 맞서는 카리스마도 갖췄다. 여성 정치인은 이미지만 있고 콘텐츠가 부족하기 쉬운데 힐러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췄다.”

대학생 심수진 씨(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는 2009년 특강을 위해 이화여대를 찾은 힐러리를 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그 어떤 유명 정치인에게서도 본 적 없는 강한 아우라를 느꼈다. “힐러리를 봤을 때 인자한 느낌이 아니라 좀 무섭기까지 했다. 강력한 포스였다. 아줌마 같은 느낌이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본 뒤 더 좋아졌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힐러리가 맨 앞줄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과연 힐러리는 세계를 경영하는 나라 미국의 여제(女帝)로 등극할 것인가.

여성 대통령 탄생을 받아들일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최근 ALGR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82%는 ‘미국이 여성 대통령을 맞을 준비가 됐다’고 답했다. 2명 중 1명은 ‘만약 여성 후보가 나온다면 선거에 더 관심을 갖겠다’고 답했다.

유명 선거 전략가 제임스 카빌 씨는 다음 대선에서 힐러리의 당선 가능성을 누구보다 높게 점치고 있다. 그는 힐러리를 가리켜 “퍼스트 네임(성이 아닌 이름)으로 통하는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대명사이자 상징이 된 이름 힐러리. 그의 이름(HILLARY)의 7개 철자를 통해 그가 걸어온 정치 여정과 인생철학, 성공 비결을 알아본다.

1997년 1월 20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의회의사당 광장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왼쪽)이 2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을 딸 첼시(왼쪽에서 두 번째)와 부인 힐러리(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켜보고 있다. 동아일보DB
1997년 1월 20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의회의사당 광장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왼쪽)이 2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을 딸 첼시(왼쪽에서 두 번째)와 부인 힐러리(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켜보고 있다. 동아일보DB
HUSBAND(남편)

“여보 축하해요, 당신은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요.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예요.”

11일 전미아버지협회 시상식 행사장. ‘올해의 아버지’로 선정된 클린턴 전 대통령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힐러리에게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자랑하며 메시지를 읽어내려 갔다.

올해 각각 67, 66세의 나이에 닭살 애정을 과시하는 빌과 힐러리 부부. 그러나 이들은 백악관에서 가장 화끈한 부부싸움을 벌인 커플이기도 하다. 클라이맥스는 빌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었다.

힐러리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 따르면 이 스캔들은 1998년 초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빌은 힐러리에게 ‘르윈스키와 성관계가 없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던 빌은 대배심 증언을 불과 이틀 앞둔 8월 15일에야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막 잠에서 깬 힐러리에게 이실직고했다. 흥분한 힐러리는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빌과 힐러리는 싸우기도 잘하고 애정 표현도 적극적인 열정파 부부다. 동시에 냉철한 정치적 파트너십의 관계이기도 하다. 1971년 예일대 로스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둘은 각자 뚜렷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빌은 대통령이 되고자 했고, 힐러리는 법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힐러리는 ‘살아있는 역사’에서 “예일대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그 긴 머리의 수염 덥수룩한 남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연 몰랐을까. 힐러리는 결혼 전부터 “빌은 장차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

결혼에 더 매달린 쪽은 빌이었다. 빌은 10차례 넘게 프러포즈를 했지만 힐러리는 2년 동안 답을 주지 않았다. 빌은 나중에 울기까지 했다. 힐러리는 최후 경고를 했다. “더이상 프러포즈하지 마라. 내 생각이 정해지면 알려주겠다.”

혼자 워싱턴에 가서 꿈을 펼칠 수도 있었던 힐러리는 빌을 따라 아칸소 시골로 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힐러리는 이미 리처드 닉슨 대통령 탄핵을 위한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최연소 변호사로 활동하며 워싱턴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자 빌은 아예 신혼집까지 장만해 압력(?)을 넣었고 힐러리는 그제야 청혼을 수락했다.

힐러리가 결혼을 결심한 배경에는 아직 여성에게 폐쇄적이던 1970년대 사회 분위기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여성 혼자의 힘으로 노력하기보다 대통령이 되려는 빌의 야망을 통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빌은 결혼 생활 내내 힐러리의 정치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대통령 부인이 된 힐러리가 유례없이 백악관 웨스트윙에 집무실을 마련하고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을 때 빌의 측근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빌은 찬성했다.

대신 빌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힐러리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빌이 비전을 제시하는 데 귀재였다면 막후에서 비전에 살을 붙이고 장애물을 식별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은 힐러리였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거겐 씨는 “빌은 날마다 힐러리의 판단을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빌이 몽상가라면 힐러리는 현실주의자다. 빌이 전략가라면 힐러리는 전술가다. 빌이 돛이라면 힐러리는 닻이다. 힐러리는 빌에게 지브롤터 암벽(튼튼하고 안전한 버팀목을 비유)이다.”

반면 힐러리는 빌로부터 대화와 타협의 기술을 배웠다. 백악관 시절 초기 힐러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대파와의 대결도 불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힐러리의 ‘킬러 본능(killer instinct)’이라고 불렀다. 이후 힐러리는 점차 빌이 상대방으로부터 최상의 장점을 이끌어내 타협안을 만들어 가는 것을 지켜봤다. 언론 기피증이 있던 힐러리가 백악관 기자실을 폐쇄하려고 했을 때 이를 막은 것도 빌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배운 타협의 기술은 나중에 힐러리가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이 됐을 때 큰 도움을 줬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파트너십이 한 명이 올라가면 다른 한 명은 내려가는 대칭적 관계라는 것. 힐러리가 건강보험 개혁 실패로 궁지에 몰리자 빌은 정치능력을 발휘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반대로 르윈스키 스캔들로 빌이 추락하자 힐러리 지지도는 치솟았다.

대통령 전기 작가이자 백악관에서 힐러리와 자주 얘기를 나눴다는 도리스 컨스 굿윈 씨는 이를 ‘시소 효과’로 설명했다. 클린턴 부부의 시너지가 단순 협력이 아닌 치열한 경쟁 관계에 기초했다는 것. 특히 힐러리는 빌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고 굿윈 씨는 e메일 인터뷰에서 밝혔다.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 시절 불만족스러운 표정일 때가 많았다. 상원의원이 되자 비로소 행복한 모습이었다. 더이상 빌의 그늘에 가려 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2008년 1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토론회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힐러리는 경선에서 졌지만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국무장관을 맡아 맹활약했다. 동아일보DB
2008년 1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토론회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힐러리는 경선에서 졌지만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국무장관을 맡아 맹활약했다. 동아일보DB
▼ 여성형 리더십, 몽골 가서 “주부 가사노동하는 부엌 좀 보자” ▼
   

INSPIRATION(영감)

힐러리는 올 1월 국무장관 퇴임을 앞두고 모처럼 CBS 인터뷰에서 집무실을 공개했다.

워싱턴 C스트리트에 있는 힐러리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작고 어두침침했다. 창문 너머 멀리 백악관이 보였다.

집무실에는 여성 두 명의 사진과 조각상이 눈에 띈다. 힐러리는 이들을 자신의 영웅이라고 설명했다. 한 명은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만큼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고 그래서 많은 찬사와 비판을 한 몸에 받았던 제32대 퍼스트레이디다.

다른 한 명은 선반 위 놓인 아프리카 흑인 여성 조각상. 임신한 몸으로 바구니를 둘러메고 머리 위에 짐을 지고 있다. 제3세계 여성의 인권에 대한 힐러리의 관심을 보여준다.

힐러리가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확고한 ‘여성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일부러 피하거나 적극 나서기를 주저하는 일부 여성 리더들과는 달리 힐러리는 여성 인권을 언제나 자신의 핵심 철학으로 강조해 왔다.

힐러리는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부모 손에서 자란 어머니는 힐러리에게 “여자도 능력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여권(女權) 운동이 급성장한 1960년대 말 웰즐리대 학생회장을 맡은 것도 힐러리의 여성 의식에 불을 지폈다.

힐러리는 1995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4차 유엔 국제여성 콘퍼런스 연설을 통해 여성계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됐다. ‘인권이 여권이고, 여권이 인권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이 연설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힐러리 공직 사상 최고의 연설”이라고 극찬했다. 국무장관 시절 힐러리의 몽골 방문을 수행했던 국무부 직원이 기억하는 일화. “힐러리가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가정집 부엌을 꼭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전임 장관 해외 방문 때는 가정집에 간 적도 없는데 부엌까지 둘러봐야 한다니. 현지 주민을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힐러리가 부엌 방문을 고집한 것은 전근대적 취사시설에서 나오는 유독가스가 여성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국무장관으로 힐러리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제3세계 화덕 개조 프로젝트였다.

“왜 성차별은 인종차별만큼 심각하게 대접을 못 받는지 모르겠다.”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 힐러리는 측근들에게 곧잘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시 경쟁자였던 버락 오바마 후보가 내건 인종 문제와는 달리 여성 문제는 유권자들 사이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데 대한 답답함의 호소였다. 힐러리 진영 일각에서는 ‘다른 유권자층을 멀어지게 한다’며 여성 포커스 수위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힐러리는 그냥 밀고 나갔다. 자신의 핵심 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인문교양학부)가 보는 힐러리는 이렇다. “보통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리에 올라간 여성 리더는 양성평등 철학이 약하다. ‘내가 여성을 위해, 양성평등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의식이 약하다. 여성이기에 오히려 여성 문제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힐러리가 각광받는 것은 이 같은 여성 리더의 ‘함정’을 넘어 확고한 젠더(性) 마인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LEADERSHIP(리더십)

“최근 4년 동안 내놓을 만한 업적은 무엇인가.” 올 1월 국무장관으로서 마지막으로 워싱턴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CFR) 연단에 선 힐러리. 리처드 하스 CFR 이사장의 이 같은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생각을 가다듬고 답했다.

“세계평화를 위해 다른 나라와 협력 체제를 갖췄다. 매일 눈에 띄는 업적을 낸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정확한 답변이기는 했지만 대통령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는 국무장관이 내놓은 답변치고는 군색했다.

사실 그동안 힐러리의 리더십에 대한 많은 논란이 제기돼 왔다. 힐러리는 역대 미 국무장관 가운데 가장 많은 112개국을 방문하며 수많은 국가 원수들을 만났지만 ‘정작 해놓은 일은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캐런 오코너 아메리칸대 교수(정치학)는 “힐러리의 업적은 구체적인 외교 성과보다 오바마 행정부의 일원으로 충실한 역할을 했다는 데서 찾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힐러리 밑에서 일했던 국무부 직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60대 중반의 여성이 쉬지 않고 여러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해외 강행군을 하려면 스태미나가 필요했다. 힐러리는 해외방문 때마다 매운 고추를 한가득 싸 갔다. 식사 때마다 핸드백에서 고추를 꺼내 먹으며 힘을 냈다.”

대통령 부인 시절 초기 힐러리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힐러리의 독단적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클린턴 대통령 당선 직후 ‘행정부에서 나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요직을 맡기로 했다. 클린턴 정권 인수팀에 전화를 건 힐러리는 “내가 백악관 비서실장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황당한 제의에 놀란 인수팀이 거절하자 이번에는 “변호사 경력이 있으니 법무장관은 어떻겠느냐”고 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동생 로버트가 법무장관을 했다는 사례까지 들었다.

힐러리는 결국 장관 대신 건보 개혁 태스크포스 수장을 맡았다. 그러나 힐러리가 공화당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건보 개혁안은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는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하는 한 요인이 됐다.

건보 개혁 실패와 르윈스키 스캔들은 힐러리가 변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상원의원에 당선된 힐러리는 독불장군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선배 의원들에게 깍듯이 경의를 표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자신을 비판했던 의원들에게 먼저 차를 마시자고 제의했고, 동료 남성 의원들에게 커피를 타서 갖다 주기도 했다.

이신화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20세기 대표 여성 리더라면 힐러리는 21세기 여성 리더”라고 말했다. 대처 전 총리가 ‘철의 여인’ ‘남자 같은 여자’로 불리며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줬다면 힐러리는 여성적 장점으로 거론되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것.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전 국무부 고위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국무장관, 상원의원으로 힐러리는 스포트라이트를 좇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기보다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다. 힐러리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더니 스포트라이트는 자연히 그를 따라왔다.”



LOSS(패배)

“100만 년이 가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Not in a million years).”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한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을 국무장관에 등용할 생각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힐러리는 최측근인 필리프 라이너스 보좌관에게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힐러리는 아직 화가 나 있었다. 힐러리는 민주당 경선 후반에 패배를 인정하고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지만 둘 사이 갈등의 골은 깊었다. 특히 오바마가 캠페인 때 “대사 집에 가서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눈 것이 전부인 사람이 어떻게 외교를 알겠느냐”며 힐러리의 외교 경력을 깎아내린 것에 분노했다.

라이너스 보좌관이 지난해 뉴욕타임스에 공개한 당시 비화에 따르면 힐러리는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한 번은 장관직 제의를 거절하기 위해 힐러리가 직접 오바마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거절 전화라고 직감한 오바마는 “나 화장실에 갔다고 해”라고 비서에게 지시하며 통화를 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힐러리는 국무장관 제안을 수락했다. “누가 나라를 위해 봉사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녀는 수락한다. 하물며 대통령의 요청인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힐러리의 측근인 커프리샤 마셜 백악관 의전보좌관의 말이다.

힐러리는 언제나 패배를 또 다른 도전의 기회로 삼았다. 힐러리 인생에 결정적 타격을 줄 뻔했던 르윈스키 스캔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치욕적인 사건이었지만 힐러리는 이를 계기로 상원의원 도전을 결심했다.

1999년 2월 19일 미 상원에서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투표를 진행하던 바로 그때. 투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던 힐러리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힐러리는 백악관에서 뉴욕 지도를 앞에 펼쳤다.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 출마 작업을 개시하는 순간이었다.

힐러리는 이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의원이나 주지사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르윈스키 스캔들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편의 정치적 사건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지 체감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힐러리 전기 작가인 칼 번스타인 씨는 저서 ‘힐러리의 삶(A Woman in Charge)’에서 말했다. “힐러리는 위기가 닥칠수록 강해지는 스타일이다.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자 클린턴 대통령은 거의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지만 힐러리는 비상회의를 소집하며 수습 모드에 들어갔다. 냉철한 직관과 판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 차기 대선의 핵, “66세 골든걸을 백악관으로“벌써 캠페인 ▼

AMBITION(야망)

“혹시 장관을 그만둔 뒤 심심하다고 생각되면 이 사실을 기억해 달라. 역대 국무장관 가운데 나중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 4명이나 된다. 혹시 다섯 번째가 될 생각은 없나.”

지난달 선배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은 힐러리와 나란히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해 대선 출마를 종용하는 농담을 던졌다. 힐러리는 “전임 국무장관을 대통령직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응수했다.

이달 초 전미패션디자이너협회 시상식에서도 힐러리의 대선 출마는 화제였다. 힐러리는 디자이너 오스카르 데 라 렌타 씨에게 공로상을 수여하기 위해 이 행사에 참석했다. 데 라 렌타 씨는 “이런 얘기를 하면 힐러리가 좋아하지 않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더니 “나는 힐러리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힐러리는 자신의 별명인 ‘바지정장(팬츠슈트)’에 빗대 “요즘 ‘프로젝트 팬츠슈트’라는 TV 패션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받아넘겨 웃음을 자아냈다.

올 2월 1일자로 장관을 그만둔 힐러리는 2개월 동안 휴식을 취한 뒤 4월부터 월 1, 2회씩 강연 등을 통해 공식석상에 나서고 있다. 힐러리가 참석하는 행사에서 대선 출마는 빠지지 않고 화제에 오르지만 힐러리는 확실한 답이 없다.

대선 출마를 점치는 사람들은 힐러리의 정치적 야망과 민주당 내 지지 기반, 캠페인 조직력을 이유로 든다. 출마 가능성을 적게 보는 쪽에서는 다음 대선이 실시되는 2016년에는 70대를 눈앞에 둔 나이가 되고, 힐러리가 재도전에 갖는 두려움이 크다고 말한다.

힐러리는 68%라는 높은 지지율 속에서 국무장관에서 물러났다. 최근 리비아 벵가지 주재 미국 영사관 피습사건 부실 대처 논란이 다시 점화되면서 지지율이 약간 떨어지기는 했지만 63%로 여전히 높다. 13%의 지지율로 민주당의 대선 출마 예상자 가운데 2위인 조 바이든 부통령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지율은 유동적이다. 지금이라도 대선 도전을 선언하고 정치 공방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면 지금과 같은 높은 인기를 유지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힐러리가 다음 대선에서 승산이 있으려면 오바마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바마 밑에서 국무장관으로 좋은 평을 들었지만 대선에 나서려면 오바마의 공과(功過)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 오코너 아메리칸대 교수는 “힐러리가 출마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오바마와의 사슬을 끊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RADICAL(급진주의자)

1969년 5월 웰즐리대 졸업식장. 도수 높은 동그란 안경에 머리를 뒤로 틀어 올린 힐러리가 연단에 올랐다. 웰즐리대 사상 졸업식에서 졸업생이 직접 연설을 하는 것은 힐러리가 처음이었다.

힐러리는 준비해온 연설 자료를 접고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정치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보고 과격하다고 나무랍니다. 정치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전쟁을 끝내는 것입니다.”

연단 한쪽에 앉아 있던 에드워드 브룩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힐러리에 바로 앞서 “학생들은 과격 시위를 중단하라”고 연설했었다. 상원의원 연설에 대놓고 반기를 들며 기성세대를 정면 비판한 힐러리의 연설은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시사 잡지 라이프는 힐러리를 취재해 ‘학생운동의 모델’이라는 내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이후 힐러리에게는 급진파 이미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다녔다. 대통령 부인 시절 힐러리를 미워했던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페미나치(페미니스트와 나치의 합성어)’라고 불렀다. 권력욕에 불타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리틀록(아칸소 주도)의 맥베스 부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힐러리가 결혼 뒤 남편의 성(姓)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인 로댐을 유지하기로 한 것도 급진파 이미지에 불을 붙였다. 힐러리는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성을 그대로 쓰겠다고 선언했다. 힐러리는 이것이 큰 논란이 될 줄 몰랐지만 보수적인 아칸소 주민들은 경악했다. 빌의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힐러리는 나중에 빌의 주지사 재도전 때 자신의 성 문제가 논란이 되자 남편의 성을 따르기로 했다.

힐러리의 급진주의자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 대통령 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치면서 내놓은 정책들은 급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힐러리가 상원의원 시절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오히려 진보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힐러리는 자신에 대해 “머리는 진보주의자, 마음은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정치적 견해는 진보적이지만 개인적 문제에서는 보수 성향이 강하다는 것. 르윈스키 스캔들 뒤 이혼을 하지 않은 것도 종교적 영향이 컸다.

미셸 스워스 조지타운대 교수(정부학)는 “대학 시절 활동 때문에 급진 좌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지만 실제로 힐러리는 다른 대학들이 과격 시위를 벌일 때 웰즐리대의 비폭력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힐러리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쪽에 기운 진보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YEARS AHEAD(미래)

힐러리의 정치 활동을 돕는 외조 남편으로 변신한 클린턴 전 대통령. 그마저도 힐러리에 대한 세간의 지칠 줄 모르는 관심에 지친 듯하다. 언제나 “힐러리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던 그는 14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버럭 화를 냈다. “지금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쌓여 있는데 아내의 대선 출마에 이렇게 관심을 두느냐. 힐러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

미국 주요 언론은 힐러리를 전담하는 기자를 한 명씩 두고 있다. 힐러리를 19차례나 인터뷰했다는 킴 가타스 BBC 기자는 ‘언제쯤 출마 여부를 밝힐 것 같냐’는 질문에 “힐러리는 주변에 ‘앞으로 2년간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물론 쉰다고 해서 정치에서 마음이 떠났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힐러리는 자신을 지원하는 ‘레디 포 힐러리’와도 계속 연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의 힐러리 담당 기자 매기 하버먼 씨는 “힐러리가 출마할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주겠다”며 “강연 대상에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만한 단체가 포함됐다면 대선 출마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내년 출간 예정인 자서전을 핵심 경선지역인 아이오와, 뉴햄프셔 등에서 집중 홍보한다면 출마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심지어 머리 모양도 신호가 될 수 있다. 지금 길게 기른 머리를 2008년 대선 경선 때와 비슷하게 전문직 여성 스타일로 짧게 자른다면 출마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머리 모양까지 관심의 대상이 된 힐러리. 60대 후반의 여성인 그가 벌써부터 미국을 대선 구도로 몰아넣으며 힐러리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도전 받는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 미국에 힐러리가 보내는 메시지 때문이다.

힐러리는 몇 년 전 10대 여성잡지 세븐틴에 기고한 글에서 ‘대담하게 맞서다(Dare to Compete)’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소개했다.

“나 역시 힘든 결정의 기로에 설 때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민한다. 그러나 도전을 피하지 않고 부딪치기로 한다. 실패하면 뭐 어떤가.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된다.” 그가 젊은 세대에 보내는 메시지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이설·최지연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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