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쿠바가 수상한 무기 거래로 국제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는 가운데 1980년대 두 차례 평양에 주재했던 외교관 출신이자 탈(脫)냉전 이후에는 쿠바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활동해 온 호세 아리오사 씨(57)가 지난달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그의 부인 피게레도 마이라 씨(57)가 지난해 7월 미국으로 망명한 데 이어 쿠바 내 유일한 ‘한국통 부부’가 모두 쿠바를 떠나온 것이다. ▶본보 1월 21일자 A6면 美망명한 쿠바 ‘한반도통’ 마이라씨가 겪은 북한과 남한
아리오사 씨는 1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 KOTRA 무역관에서 망명 후 한국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서울 출장을 명분으로 해외여행을 허가받아 지난달 14일 캐나다 토론토에 나온 뒤 다음 날 나이아가라 폭포의 다리를 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말했다.
쿠바 아바나대와 김일성종합대에서 조선말을 배운 아리오사 씨는 김일성 주석을 여러 차례 만났으며 평양과 아바나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탈북 전 황장엽 노동당 국제비서 등의 통역을 수차례 맡았던 북한 현대사의 증인이다.
냉전 이후에는 아바나종합대 산하 아시아·대양주연구소 교수와 연구원(1994∼2002년), 문화부 산하 예술·영화산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며 한국을 7차례 방문하는 등 미수교 상태인 한국과 쿠바의 민간외교에 기여했다.
그는 “평양 주재 근무를 마치고 나올 때인 1990년과 쿠바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을 당시인 1994년 두 차례 망명을 생각했다가 이루지 못했다”며 “먼저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아리오사 씨의 두 아들도 각각 2004년과 2012년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다.
아리오사 씨는 “개인의 이기심을 더 자극해 경제를 일으키지 못하면 쿠바의 미래는 여전히 어둡다”며 “쿠바 내부의 개혁과 개방 속도가 여전히 더디다”고 지적했다.
“많은 쿠바 사람들이 ‘우리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을 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이 집권한 뒤 집을 사고팔 수 있게 됐고 해외여행이 전보다 쉬워졌지만 아직 쿠바인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쿠바에서는 ‘아내가 외간 남자와 집에서 바람을 피운 것을 발견한 쿠바 남편은 고민 끝에 침대만 바꾸고 그냥 산다’는 농담이 있다”며 “카스트로 정부가 사회주의 계획경제, 카스트로 독재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말하지 않고 늘 주변만 맴도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해 당 대회를 앞두고 라울은 경제 전문가들의 참여를 당부했지만 올해는 행정부와 의회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면서 경제를 모르는 정치인들을 대거 등용했다”며 “당과 의회, 행정부의 손발이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최근 북한과 쿠바의 무기거래 의혹 등 북한과 쿠바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지만 북한과 쿠바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불과하다”며 “쿠바가 북한에 설탕을 수출하기는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 정치와 군사 협력 외의 경제적인 관계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외부인들이 쿠바와 북한을 동급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는 “같은 사회주의 독재국가지만 북한이 더 문제가 많은 체제”라고 잘라 말했다. 쿠바도 사회주의 독재국가이지만 북한처럼 지도자를 우상화,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것.
평양에서 김일성 부자를 여러 차례 직접 볼 수 있었던 그는 “김일성 주석은 대중에게 인기가 많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말을 똑똑하게 해 통역하기 쉬웠고 피델처럼 연설을 좋아해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대중의 인기는 아버지에게 못 미치고 카리스마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아리오사 씨는 시들어가는 북한-쿠바 관계와는 정반대로 한국과 쿠바 사이의 경제적 관계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 조만간 국교 정상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망명 직전까지 아시아 각국과 쿠바의 영상물 교류 심의 업무를 맡아온 그는 “한국 영화가 쿠바 국영TV에 방송되는 등 쿠바에도 한류 열풍이 거세다”고 소개했다.
최근에는 김남주 씨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2008년과 2011년에는 아바나 시내의 영화관 하나를 일주일 동안 통째로 빌려 한국 영화를 상영한 ‘한국영화 주간’ 행사가 열렸다. 아리오사 씨는 “현대·기아차의 자동차, 삼성그룹의 가전제품 등이 쿠바의 상점에서 한국을 알리고 있다”며 “한국과 쿠바 관계가 더욱 활발해지면 두 나라 사이를 잇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2003년 북한과 한국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아바나대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도 받은 그는 “북한을 떠나온 1990년 이후 한국은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며 “나를 한반도와 연결해 준 것은 북한이었지만 자유롭고 넓은 세계로 인도해 준 것은 한국”이라고 말했다.
미국 현지에서 이 부부의 정착을 돕고 있는 사람은 조영수 KOTRA 마이애미 무역관장이다. 그는 2005년 쿠바 아바나 무역관을 개설하면서 마이라 씨를 현지 직원으로 채용하며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조 관장은 “아바나 무역관 개관의 주역들이 다시 마이애미에서 뭉치게 된 셈”이라며 기뻐했다.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지 꼭 10일째인 지난달 24일은 그의 57번째 생일이었다. 1년 만에 만난 마이라 씨를 비롯해 두 아들 내외, 맏아들의 딸인 네 살짜리 손녀 아만다가 그의 탈출을 기뻐했다. 가족은 생일 케이크에 큰 초 하나만을 꽂았다. 자유로운 미국에서 맞는 첫 생일이라는 의미였다.
아리오사 씨는 “아내와 떨어져 혼자 생활한 지난 1년은 너무 힘들고 고독했다”며 “당국에 적발될까 봐 두려워 늙은 부모에게도 망명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과 한국 친구들의 명함 600여 장 등 연락처도 못 챙겨 나온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호세 아리오사는…
△1956년 쿠바 아바나 출생 △1972년 쿠바 외국어대 조선어과 졸업 △1976∼78년 북한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연수 △1986∼90년 평양 주재 쿠바대사관 근무 △1990∼94년 아바나 통역 및 번역센터 조선어 통역원 △1994∼2002년 아바나대 아시아 및 대양주연구소 연구원 △1996년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2010년까지 한국 7차례 방문) △2002∼2013년 문화부 산하 예술 및 영화산업연구소 책임연구원 △2003년 아바나대 박사학위(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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