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역사왜곡, 독도 영유권 도발에 이어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 사용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전해지면서 한일 관계에 악재만 쌓이고 있다. 거듭된 일본의 도발에 한국이 미온적으로 대응해 화를 키웠다는 지적마저 제기된다.
일본의 욱일기 도발은 그 빈도가 잦아지는 양상이다. 지난해 5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체조 대표팀은 욱일기를 형상화한 유니폼을 공개해 비판이 제기됐다. 같은 해 8월 30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세 이하 여자월드컵 한일전에서도 일본 응원팀이 욱일기를 반입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일본축구협회가 좀 더 정확히 욱일기를 감시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는 유감 표명만 했을 뿐 국제축구연맹(FIFA)에 공식 제소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도 욱일기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에는 일본이 공세적으로 나왔다. 일본은 한국의 ‘붉은악마’가 내건 현수막(‘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에 항의하는 공문을 동아시아축구연맹(EAFF)에 보냈다. 이에 축구협회는 “일본 응원단이 먼저 대형 욱일기를 휘둘러 우리 응원단을 자극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라고 방어적인 대응을 했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욱일기 사용을 어디까지 문제 삼을지 공론화된 적이 없고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도 정리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일본 육·해상자위대가 1954년부터 군기(軍旗)로 욱일기를 사용해 왔고 일본 상품과 민간기업에도 광범위하게 욱일기가 활용되고 있으나 한국 사회가 이를 둔감하게 받아들여 온 것 아니냐는 자성론이 나온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를 욱일기에 대한 대책을 정립하는 계기로 삼자고 밝히고 있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장기라는 국기가 있는데도 욱일기를 공식 사용하겠다는 것은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이 퇴행한다는 의미”라며 “일본의 자정 노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피해자인 한국 정부의 강력한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도 “침략전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한국과 갈등이 불거진 김에 전범국가의 굴레를 벗고 보통국가화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며 “한국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이 욱일기 사용을 공식화하더라도 이를 물리적으로 막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하지만 한 외교 전문가는 “국제여론을 활용해 욱일기의 역사적 의미와 일본의 몰염치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말했다. 다음 달 7일 도쿄의 2020년 올림픽 유치 여부를 결정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역사인식 부재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등의 대응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제 침략을 받았던 동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해 양식 있는 일본 시민사회의 여론을 깨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8·15 광복절을 앞둔 시점에 나온 일본의 욱일기 사용 공식화 움직임은 냉랭한 한일관계를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악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당국자는 “일본 총리와 관방장관, 외상이 광복절 전후에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며 “이들의 참배는 한일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레드라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이들이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다면 외교부 차원의 대일 대응이 청와대 차원으로 높아질 개연성이 그만큼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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