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일본 교토(京都) 시내 동쪽에 자리 잡은 호국(護國)신사. 35도가 넘는 찜통더위 속에 일본인 부자(父子)가 전사자 수백 명의 이름이 새겨진 대형 비석에서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약 5분 후 아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찾았다”고 외쳤다.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라고 말했다.
교토 호국신사는 180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때까지 교토 출신 전사자 7만3011명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호국신사는 일본 전역에 걸쳐 52개나 된다. 도쿄(東京) 도를 빼고 모든 지방에 1개 이상씩 세워져 있다. 도쿄 도의 경우 야스쿠니(靖國)신사가 호국신사 역할을 대신한다.
교토 호국신사는 매일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야스쿠니신사가 도쿄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호국신사는 대부분 도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지역민이 쉽게 찾을 수 있다.
교토 호국신사에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자살 공격을 감행한 특공대를 부조(浮彫)해 놓은 조형물이 보였다. 아래에는 ‘아, 특공. 우리는 결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였다. 특공대 조형물 옆으로 기병대 조형물과 전쟁 때 죽은 말을 기리는 ‘애마(愛馬)의 비’도 눈에 띄었다.
호국신사 오른편 산비탈에는 크고 작은 묘비가 들어서 있었다. 묘비는 어른 팔 하나 크기로 가느다란 반면에 현창비 표창비 위령비 등은 어른 몸 하나 크기로 웅대해 보였다. 70대 할머니가 ‘긴시(金치)훈장의 역사’라고 적힌 대형 비석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은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열강에 의해 강력한 경제 봉쇄를 당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조국의 자위와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결연히 일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강과 싸웠다….” 일본의 침략 전쟁을 ‘아시아의 해방’으로 왜곡한 비석이다.
제23야전방역급수(防疫給水)부 전몰자 위령비에는 ‘쇼와(昭和) 20년(1945년) 6월 20일 오키나와(沖繩) 남부에서 옥쇄(玉碎)’라고 적혀 있었다. 옥쇄는 ‘옥이 부서지듯 아름답게 죽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미화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오키나와에서 자행된 집단 자결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1945년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자 일본군은 퇴각길에 1000명 가까운 주민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옥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비문을 읽는 일본인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위령비와 표창비에 적힌 글귀를 읽다 보면 침략 전쟁에서 사망한 전몰자들이 ‘위대하고 감사한 인물’로 인식된다. 지역민들은 굳이 야스쿠니신사에 가지 않더라도 지방 호국신사에서 자연스럽게 군국주의 역사관에 익숙해진다. 이 때문에 호국신사는 ‘지방의 야스쿠니신사’로 불린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을 지배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야스쿠니신사와 지방의 호국신사(당시 명칭은 ‘초혼사’)를 군국주의 시설로 규정하고 모두 없애라는 포고문을 냈다. 하지만 GHQ의 통치가 끝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지방 초혼사를 모두 재건시키고 이름도 호국신사로 바꿨다. 지방자치단체와 유지들은 충혼탑과 충령비를 다시 만들었다. 1960년 쇼와 일왕은 52개 호국신사에 공물을 바쳐 일반 신사와 다른 특별한 대접을 했다.
교토 호국신사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인도인 R 펄 판사의 기림비가 있다. 펄 판사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참여한 판사 11명 가운데 1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을 포함한 일본인 피고 전원의 무죄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도쿄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에 하는 복수극’이라는 논리로 무죄를 주장했다. 지금 일본 극우파는 “도쿄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할 때 이 같은 논리를 댄다. 기림비에는 “펄 박사의 판결은 현재 세계 국제 법학계의 여론”이라는 주장도 새겨져 있다.
야스쿠니신사와 마찬가지로 호국신사에도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 가장 많은 참배객이 모인다. 한국 중국 등은 일본 총리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비판하지만 호국신사 참배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호국신사는 야스쿠니신사처럼 비판의 표적도 되지 않으면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심어주는 유물로 건재한 것이다.
호국신사 내 여고생 4명이 눈에 띄었다. 방학을 맞아 교토 내 신사와 절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전쟁 때 사망한 ‘일반인’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에 놀랐다. ‘조상들이 왜 사망했는지 아느냐’고 묻자 학생들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죽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이들은 신사 입구에서 20세기 역사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역사에 어두운 일본 미래 세대들이 굴절된 역사관을 자연스레 몸에 익히는 현장이 곧 호국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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