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태풍 ‘하이옌(海燕)’이 휩쓸고 간 필리핀 중부 레이테 주(州)의 주도 타클로반은 해안에서 1km 이내에 남은 건축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 이번 태풍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 도시에서는 인구 22만 명 중 무려 1만 명 이상이 숨졌다. 웬만한 가옥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도시 전체가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군데군데 야자수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피해 지역에서는 물과 음식을 구하지 못한 일부 시민들이 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 유령 도시로 변한 타클로반…약탈 행위 기승
CNN 등 주요 외신은 타클로반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고 참상을 전했다.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시내 곳곳에 널려 있는 데다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일부 지역에서는 시신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한 호주 여성은 “오늘 본 시신만 100구가 넘는다”고 말했다. 또 파손된 건물과 차량 등의 잔해가 도시 위를 나뒹굴면서 주요 도로와 공항 등 시내 곳곳이 쓰레기장처럼 변했다.
폐허로 변한 도시에서 일부 시민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곳곳에서 약탈을 벌이는 등 사회 혼란도 극에 달하고 있다. 주민들이 상점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치고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부수고 돈을 빼가는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필리핀 민간항공국의 윌리엄 호키스 국장은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이처럼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태풍에 가족을 잃은 주민들의 사연도 속속 나왔다. 주민 마빈 이사난 씨는 CNN과 인터뷰에서 “아내와 함께 15, 13, 8세의 세 딸을 안고 가다 파도에 휩쓸려 딸들의 손을 놓고 말았다”고 울부짖었다. 그는 “어린 두 딸은 시신으로 발견됐고 큰딸은 아직도 실종 상태”라며 “제발 큰딸만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절규했다.
○ 사망자 늘어날 전망…복구 작업도 시간 걸려
타클로반이 이처럼 하이옌의 직격탄을 맞은 이유는 이곳이 저지대 해안 도시인 데다 필리핀 정부가 태풍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초 필리핀 정부는 침수 취약 지역을 중심으로 80만 명의 주민들을 사전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하지만 하이옌의 풍속을 실제 시속 378km보다 느린 시속 270km 정도로 잘못 예상해 피해를 키웠다.
특히 하이옌이 타클로반을 강타할 때 4∼6m 높이의 태풍해일이 도시를 덮치면서 사망자 수가 급증했다. 태풍해일은 태풍 등 열대 저기압 때문에 해수면이 높아지는 현상으로 특히 섬과 섬 사이에서 발생할 때 피해 규모가 커진다. 태풍해일을 목격한 주민들은 “2004년 지진해일(쓰나미)을 다시 본 듯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호 전문가들은 타클로반 등의 피해 상황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열악한 도로 및 항공 사정 등으로 구조대와 치안 당국의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 사상자 수가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테 섬과 사마르 섬 일대의 항공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구호 물품을 대량으로 수송해 오기가 어렵고, 도로 위에 나뒹구는 건물 잔해 등으로 차량 이동도 쉽지 않다.
리처드 고든 필리핀 적십자사 총재는 “재난 현장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재난 현장에 가려면 최소 하루나 이틀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이옌이 최초 상륙한 사마르 섬의 기우안 등 일부 도시도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 이틀간 외부와 연락이 끊기고 의료용품과 생필품 등이 부족한 탓에 부상자들도 치료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타클로반 현지의 세인트폴 병원은 환자로 만원이지만 의약품은 이미 바닥났다. 타클로반 공항 안에 급히 마련된 임시 안치소도 넘쳐나는 시신들로 만원이어서 더이상 시신을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필리핀의 주요 휴양지 세부, 보홀, 보라카이 섬 등은 하이옌으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항공편 결항 사태가 이어지면서 상당수 관광객들의 발이 묶이거나 귀국이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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