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일본 후쿠시마(福島) 현 이와키(磐城) 시의 한 가설주택. 니시우라 후미오(西浦二三夫·66) 씨는 “대지진 이후 벌써 10번이나 거주지를 옮겼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원전에서 불과 3.5km 떨어진 오쿠마(大熊) 정에서 살던 그는 대지진 다음 날 ‘원전이 위험하니 서쪽으로 가라’는 말만 듣고 통장, 도장, 이불을 챙겨 옆 마을로 피신했다. 하지만 바람의 영향으로 옆 마을도 위험해져 이사를 거듭했다. 그 사이 원래 살던 지역은 ‘귀환곤란구역’으로 지정돼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는 “사고 초기 정부는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 정부와 언론은 일부 지역에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했다.
5일은 동일본 대지진(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다. 지난달 28∼30일 일본 외무성 초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후쿠시마 현을 방문해 주민과 공무원 등 20여 명을 만났다. 이들은 침착하고 의연했지만 불안과 체념의 그림자도 엿보였다.
○ 우편물도 오지 않는 유령도시
지난달 30일 찾은 이타테(飯館) 마을은 ‘유령도시’였다. 원전에서 40km 떨어진 이곳은 북서풍을 타고 방사성물질이 날아와 직격탄을 맞았다. 주민 6000명은 모두 피신했고 학교도 폐쇄돼 학생들은 인근 임시학교로 옮겼다.
신문도, 우편물도 오지 않는 이곳에서 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주유소에서 만난 주민은 “오전 6시 반에 와서 일을 하다가 오후 6시에 임시 거처로 돌아간다”며 “방사능 제거 차량이 간혹 와서 연료를 넣는다”고 말했다. 그가 가진 방사선 측정기에는 실내임에도 0.36μSv(마이크로시버트)가 찍혔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3.15mSv(밀리시버트)다. 일반인의 연간 피폭 한도는 1mSv다.
주유소에 있던 다른 주민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언제 모일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죽더라도 집에서 죽겠다’는 고령자 20여 명은 밤에도 돌아가지 않고 몰래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 “평생 어부로 살았는데…”
원전 사고는 특히 어민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후쿠시마 현 수산회관에서 만난 야부키 마사카즈(矢吹正一·77) 이와키시어업협동조합장은 “어부인 아버지를 보고 커서 평생 어부로 살았다. 그런데 원전 사고 때문에 2년 넘게 바다에 못 나갔다”고 말했다.
올해 10월 시험 조업이 재개됐지만 지역과 어종이 극히 제한된 데다 후쿠시마산 수산물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도 여전해 연료비도 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 어업 관계자는 “대지진 전 이와키 시에 있던 어선 378척 중 270척이 쓰나미(지진해일) 피해를 입었다. 간신히 복구해 정상적인 배를 202대로 늘렸는데 현재 14척만 시험 조업하고 나머지는 논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만난 공무원과 어민들은 수산물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올해 7∼9월 후쿠시마 현 수산물 2148개 샘플을 조사한 결과 기준치인 kg당 100Bq(베크렐)을 넘은 것은 47건으로 2.2%에 그쳤다. 후쿠시마 현 관계자는 “기준치를 넘은 경우 같은 어종은 모두 시중에 유통시킬 수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 흔들리는 민심
200만 명을 넘었던 후쿠시마 현의 인구는 사고 이후 8만 명가량 줄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이 지역을 떠나 만 14세 이하 인구가 10% 넘게 줄었다. 방사능 수치는 많이 낮아졌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기준치보다 높다.
이와사키 미키히코(岩崎幹彦·69) 후쿠시마현직원퇴직자회 회장은 “도쿄의 정치인들은 원전사고로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지만 현에서는 1500명이 원전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자살도 늘었고, 지병이 악화돼 세상을 떠나거나 가설주택에서 나오지 않고 방에만 있다가 고독사하는 이주민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원전의 안전 신화가 무너진 것에 대한 배신감이 가장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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