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한반도에는 서세동진(西勢東進)의 물결이 숨 가쁘게 몰아닥쳤다. 메이지유신 이후 성장한 일본이 중국의 빗장을 열려는 시도가 본격화한 때였다. 쇄국의 열쇠를 풀고 자력갱생을 위한 개방과 개혁을 추구했던 갑오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1894년 한반도는 청일의 전쟁터로 변했다. 국운이 쇠한 조선은 열강에 흔들렸고, 차차 일본의 영향권하에 끌려들어갔다.
2014년 갑오년에는 동세서진(東勢西進)의 기운이 보인다. 한중일을 포함하는 동아시아가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 투자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아시아로의 회귀는 미국만의 몸짓이 아니라 세계적 트렌드가 됐다. 1978년 개혁 개방으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2010년 일본을 추월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중일 양강이 경합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일본의 상대적 추락 속에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중일 간의 경쟁은 다시 동아시아에 대립과 갈등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본과 덩치 큰 중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국내의 외교안보 전략가들도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중국 일본 북한을 다루는 시각은 백가쟁명이다. 대외전략에 대한 합의가 흔들리면서 서로 다른 테이블에 끼리끼리 앉으려 하는 모습은 19세기 말을 연상시킨다. 동아시아에서 세력 전이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국내에서 대외전략 노선을 두고 이전투구하는 모습은 1894년과 비슷하다.
그러나 2014년의 동아시아와 한국은 1894년과 다르다. 우선 한국이 19세기 말의 약소국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래들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는 아니다. 돌고래 정도의 몸집과 명민한 적응력을 갖추었다. 분단이라는 현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의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문(文)을 여전히 숭상하지만 무(武)를 겸비한 중견국이 된 것이다. 한국이 동아시아를 좌우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나라들도 한국을 무시할 수 없는 파워로 성장했다.
또한 21세기의 한국은 세계의 흐름을 외면한 채 쇄국주의를 고수하던 폐쇄국가가 아니다. 동아시아 어느 국가보다도 개방적인 국제통상 선진국이자 발전된 기술력과 소프트 파워로 세계적 트렌드를 선도하는 측면도 있다.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낸 소중한 자산도 가지고 있어 개발도상국에는 선망의 대상이다.
지금의 한국은 고립무원의 외톨이도 아니다. 1894년에는 서구 열강들과 연계가 없었지만, 2014년의 한국은 세계 최강 국가이자 민주주의의 선도국인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역내의 갈등이 증폭될 경우 역외의 미국이나 유럽과 유연한 연계전략을 펼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을 갖고 있다.
하지만 1894년에는 없었던 커다란 도전이 앞에 놓여 있다. 한반도가 둘로 갈라진 분단국가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다. 이념과 체제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한민족 공동체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느냐는 21세기 한국의 가장 커다란 과제이다. 분단의 극복은 또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담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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