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할아버지 “죽기 전에…” 일제탄광 고발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8일 03시 00분


강제징용 피해자 신고 이명옥 옹… “日서 일하면 잘 먹어” 꾐에 승선
탄광 일하다 허리 펴면 몽둥이질… 왼발 다쳐 절룩거리며 4년 노동

73년 전 이명옥 옹(95·사진)이 대한해협을 건넌 때도 바로 3월이었다. 1941년 당시 22세였던 이 옹은 전북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고향마을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얼마 전 마을에 찾아온 일본인들이 “일본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전한 말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두 형과 함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이 옹은 솔깃했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 젊은이 여러 명이 동행했다. ‘잘살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남 여수항에서 일본행 배에 오르자 그동안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던 일본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옹은 “영문도 모르고 맞았어. 가져온 짐도 다 빼앗기고…. 더 무서운 것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거였지”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배 안에서 이틀이 지나자 드디어 배는 멈췄다.

배에서 내린 뒤 다시 차량에 짐짝처럼 실려 간 곳은 일본 후쿠오카(福岡) 현 이즈카(飯塚) 시에 있는 한 탄광. 미쓰비시(三菱)사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 옹을 데려온 사람들은 미쓰비시 탄광 직원들이었다. 광원의 상당수는 이 옹처럼 조선 출신의 젊은이였다.

졸지에 탄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 옹은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렸다. 그 대신 누가 붙인지도 모르는 ‘구니모토(國本)’란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다. 깊이 수백 m의 막장에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석탄을 캐는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쉬는 날도 없었다. 이 옹은 “잠깐 일해도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될 정도로 더웠다. 식사는 주먹밥 한 개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주먹밥 먹을 때만 쉴 수 있었다. 휴식시간은 아예 없었다”고 회상했다.

굽힌 허리를 잠시라도 펴려고 하면 어김없이 ‘게으르다’며 몽둥이가 날아왔다.

1▼ 恨 못풀었는데… 위로금 신청 6월에 끝나 ▼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갱도가 무너지면서 죽는 장면도 수시로 목격했다. 이 옹도 낙석으로 왼쪽 발의 신경 부위를 다쳤다. 지옥 같은 탄광생활은 4년이 넘어야 끝났다. 그리고 1945년 10월 다리를 절며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당시 경험에 대해 그저 “악몽을 꿨다”며 기억 속에 묻었던 이 옹은 지난달 18일 전북 완주군청 민원실을 찾았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 피해자 조사를 신청하기 위해서다. 뒤늦게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지원 사실을 들은 가족의 권유 때문이다.

14일 위원회 조사관 4명이 이 옹을 찾았다. 이들은 이 옹 및 유족들의 진술 녹화, 부상 부위 촬영 및 동네 주민 진술 확보 등 조사를 진행했다. 이 옹의 사연은 앞으로 객관적인 심사를 거친 뒤 위로금 지급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현재 일본 및 해외에서 강제징용 등으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뒤 한국으로 돌아온 피해자들에 대해 사망 시에는 2000만 원, 부상 시에는 최소 300만 원에서 최대 2000만 원과 치료비 명목으로 연간 80만 원씩이 지급된다. 현재까지 7만여 명이 5500억 원의 위로금을 지급받았다. 위로금을 지급받으려면 관련법상 올 6월 30일까지 신청해야 한다.

완주=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강제징용#일제탄광#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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