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의 유골 72위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뼛조각이 돼 백색 단지 3개에 뒤섞여 담겨 있었다. 항아리는 조그만 밥솥 크기에 불과했다. 이들 중 누가 이런 가혹한 운명을 예상했을까. 꿈을 피워보지도, 고향을 다시 찾지도 못한 채 잊혀질 것을….
지난달 20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 시 서쪽 외곽에 자리한 혼간지(本願寺) 삿포로 별원(別院). 베쓰단 즈이쇼(別段瑞生) 스님이 안내한 계단 아래에는 유골 보관함과 제단이 수납장 형태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스님은 이 중 한 곳에 초를 밝혀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들의 유골 보관함 앞이었다.
보관함의 단지 3개에는 중국인 징용 노동자 유골까지 포함한 101위가 들어 있다. 홋카이도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했던 한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 징용 노동자 유골을 따로 보관하다 1997년 혼간지에 맡겼다. 당시 유골 명부에는 한국인 징용자 72명 중 일부의 본적과 창씨개명된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혼간지가 2002년 징용자 유골 보관 사실을 발표한 뒤 8명의 한국인 유족이 혼간지를 찾았다. 하지만 유골을 가져가진 못했다. 유골 101위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서 숨진 징용자에게 정말 죄송하다. 유골은 평생 절에서 소중하게 모시겠다.” 베쓰단 스님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묻어났다.
○ 가장 위험한 채탄장에 배치된 조선인
영화 ‘러브레터’와 눈 축제로 잘 알려진 홋카이도엔 3월에도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금 은 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곳엔 71년 전에 수많은 조선인이 끌려왔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워 강제 징용자들이 가장 기피한 곳. 바로 홋카이도다.
삿포로에서 홋카이도 내륙 쪽으로 기차를 타고 40분을 더 들어가자 비바이(美唄) 탄광이 나타났다.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증산(增産) 압박이 강해지자 대기업인 미쓰비시(三菱)는 징용자를 사실상 감금하고 채탄을 강요했다. 노동 강도를 이기지 못해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경북 경주 출신의 천만수 씨(1920년 출생)가 이곳에 끌려온 것은 결혼 3년차이던 1943년 11월이었다. “무조건 나오라”는 면 서기의 요구에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1차 집결했던 부산에는 다른 마을에서 온 젊은이 50여 명도 있었다. 시모노세키(下關), 아오모리(靑森)를 거쳐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비바이 탄광이었다.
첫날부터 상상도 못했던 고통이 이어졌다.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깊숙한 채탄장에 배치됐다.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밥과 단무지만 먹고 지하 수직갱 안으로 들어가 하루 10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다. 밥은 항상 부족했다. 점심은 감자나 호박죽에 그쳤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누렇게 뜨고 부었다. 1944년 5월 갱도 내 가스 폭발로 천 씨의 한쪽 팔에서 살점이 뜯겨나갔다. 천 씨는 광복 뒤 고향에 돌아왔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구술자료집).
“출입구 뒤 언덕 보이죠. 저기에 독신자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 왔으니 천 씨와 다른 조선인들이 저곳에서 살았을 겁니다.”
비바이 탄광 취재에 동행한 이 지역 향토사학자 시라토 히토야스(白戶仁康·77) 씨가 멀리 보이는 언덕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빨간 철골 기둥 보이지요. 수직갱으로 들어가는 입구예요. 한국인 2800여 명이 강제로 끌려왔답니다. 그중 517명은 목숨을 잃었지요.”
1972년 폐광 이후 공원으로 변한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은 현재는 영락없는 휴양지였다. 강제징용 자료를 40년 이상 모아 온 시라토 씨의 설명이 없었다면 한국인 징용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일본 내 다른 징용지의 사정 또한 마찬가지다.
○ 아직도 한 못 푼 혼간지의 유골
“1945년 무렵 비바이 시내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당시 조선인 징용자의 자녀도 꽤 많았습니다. 워낙 나이가 어릴 때여서 아무런 생각 없이 같이 놀았죠.”
역사의 기록이라도 남기려는 듯 70여 년 전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놓는 시라토 씨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강제 징용 노동자의 실상을 깨달은 그는 치를 떨었다고 한다. “징용 노동자들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술에 취해 혹 싸움이라도 벌어져 일본 경찰이 출동하면 회사 측은 사건을 해결해준다는 조건으로 계약기간을 연장했습니다. 폭행이나 학대도 흔했죠.”
그는 탄광에서 5km 떨어진 지점을 가리키더니 “여기에 경찰서가 있었다. 도망치는 징용자를 잡는 게 경찰의 주 임무였다. 잡히면 항상 가혹한 구타가 잇따랐다”고 말했다.
천 씨처럼 살아 돌아온 강제징용 피해자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45년 기준 홋카이도에는 14만5000명이 강제 징용됐고 최소 2285명이 사망했다. 미쓰비시나 미쓰이(三井) 등 대기업에서 2차, 3차 하청을 받은 중소기업들은 조선인 유골을 방치했다. 조선인 징용자 유골이 홋카이도 전역의 사찰에 산재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에서 일제의 강제징용 사죄를 요구하고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동토를 떠도는 영혼들의 한(恨)을 씻어내기엔 부족할 뿐이다.
강제징용 현장을 취재하던 내내 홋카이도엔 폭설이 쏟아졌다. 흰눈이 일제의 과거 악행을 덮을 수 있을까. 혼간지 유골함을 밝히는 촛불은 일제의 어두운 과거를 잊지 말라며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 유골 60여기 찾은 ‘훗카이도 포럼’ ▼ “죄없는 영혼 달래주자” 뜻모은 韓-日200여명 직접 발굴작업도 진행 채홍철 대표 “양국 정부 관심을”
2006년 8월 홋카이도(北海道) 최북단 사루후쓰(猿拂) 촌에서 한일 공동 발굴작업이 진행됐다. 한국과 일본 학생 300여 명이 모여 풀과 나무가 무성한 땅을 며칠 간 파내려가자 두개골 하나가 나왔다. 곧이어 갈비뼈 골반뼈 등도 발견됐다. 일제강점기 아사치노(淺茅野)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사망한 한국인 유골이었다.
발굴을 주도한 사람들은 시민단체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 소속이었다. 포럼은 2010년까지 사루후쓰 촌에서만 유골 39구를 발굴했다.
채홍철 포럼 공동대표(사진)는 지난달 20일 삿포로(札幌) 시내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일본 정부나 기업이 나서지 않자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죄 없는 영혼들을 달래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징용자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자’고 뜻을 모은 포럼은 2003년 발족했다. 그 전해였던 2002년 혼간지(本願寺) 삿포로 별원은 “징용자 유골 101기를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계기로 홋카이도 내 시민운동을 하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유골 찾아주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포럼의 현재 회원은 약 200명.
이들의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자 홋카이도 전역의 사찰에서 “한국인 징용자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포럼은 지금까지 비바이(美唄)에서 6기, 도마리(泊)에서 8기, 무로란(室蘭)에서 4기, 네무로(根室)에서 2기, 누마타(沼田)에서 1기, 히가시카와(東川)에서 2기 등 모두 23기의 한국인 유골을 찾았다. 무로란과 누마타의 유골은 한국 유족들이 직접 찾아와 모셔갔다.
당초 홋카이도 포럼은 유골 정보를 수집해 유족을 찾아주는 일을 했지만 2006년부터 유골 발굴작업도 시작했다. 사루후쓰 촌 발굴이 첫 작업이었다. 그 후에도 한국인 징용자가 단체로 매장됐다는 제보를 받고 세 차례 더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유골을 찾지는 못했다.
채 대표는 “아버지도 1940년 징용돼 홋카이도로 끌려왔고 광복 뒤에는 유골을 유족들에게 찾아주는 일을 하셨다.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양국 정부도 이 작업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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