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미정상의 궁합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9일 03시 00분


DJ, 클린턴과 ‘찰떡궁합’… 부시와는 사사건건 충돌

60년을 넘은 한미동맹은 안보동맹을 넘어 21세기 가치동맹을 지향할 정도로 탄탄해졌지만 역대 한미 정상들의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갈등을 빚은 주요 요인은 주로 대북관(對北觀)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양국 정상이 대북정책에서 의기투합한 시기도 있었지만 둘 간의 호흡이 맞을 때쯤이면 한 명이 퇴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5년 단임(한국)과 4년 중임(미국)이라는 양국의 대통령제 차이 때문이다.

김영삼(YS)과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임기를 동시에 시작했다. 처음엔 손발이 잘 맞는 듯했다. 취미 역시 조깅으로 같았다. 1993년 7월 방한한 클린턴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서 김 대통령과 나란히 뛰는 모습은 한미 공조의 상징처럼 비쳤다. 하지만 북핵 위기와 대북 정밀타격(surgical strike) 시나리오, 이어진 제네바 합의에서 한국이 소외되면서 두 사람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1995년 북한 잠수함의 강릉 침투사건 때는 격분한 YS가 미국과 사전 협의도 거부한 채 단독 군사행동을 강행하려다 클린턴으로부터 “한미동맹 성격이 바뀐 거냐”고 추궁 받는 등 갈등이 적지 않았다.

클린턴은 김대중 대통령(DJ)에게 깍듯한 예우로 대하고 자신의 평양 방문을 상의할 만큼 관계가 돈독했다. 하지만 뒤이어 취임한 대북 강경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사건건 한국과 부딪쳤다. 2001년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탄도미사일(ABM)조약을 지지한 것은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MD)체제를 반대한 것처럼 비쳐 큰 파장을 불렀다.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DJ를 ‘이 양반(this man)’이라고 지칭한 것은 또 다른 설화를 야기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속도를 내려던 한국 정부의 남북관계 구상은 2002년 10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한 데 이은 2차 북핵 위기 발생으로 차질을 빚었다.

‘노무현과 부시’의 궁합도 “역대 최악에 가까웠다”(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대사). 미국이 김정일을 ‘피그미’라 하고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 ‘불량국가’로 원색 비난하면서 햇볕정책 계승자를 자처한 노무현 정부는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반미(反美)면 좀 어떠냐’던 노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예측 불가능한 인물” “약간 정신 나간(crazy) 인물”이라고 자서전에 쓸 만큼 미국으로부터 평가절하됐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에 호응해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했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등 의미 있는 성과도 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미 대통령 별장)에 초대받는 등 부시 대통령과 인간적인 친밀감을 과시했지만 재임 기간이 1년밖에 겹치지 않았다. 이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지만 이는 정상끼리의 궁합 덕분이라기보다는 안보협력 차원의 성격이 컸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한미정상#한미동맹#한미외교#가치동맹#미국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