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전 게이오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다. 그가 18일 서울에서 '역사마찰 속의 일한관계-4개의 시나리오'라는 주제로 한일관계를 전망했다. 동서대 일본연구센터(소장 정구종)가 주최한 '제44회 동서사랑방'에서다. '동서사랑방'은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서울사무소(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한 달에 한번 꼴로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를 듣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이다. 매번 한일문제에 전문성과 관심이 있는 한일 양국의 학자, 외교관, 언론인 등 20여명 이상이 참석한다.
오코노기 전 교수는 이날 일본의 월간지 '東亞' 3월호에 실린 같은 주제의 기고를 토대로 강의를 했다. 그는 현장 강의와 기고를 통해 한일 관계가 꼬이게 된 원인도 4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는 역사문제와 영토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그전에도 몇 차례 독도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토문제에 국한된 행동이었다고 그는 분석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의 회담(2011년 12월)에서 위안부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그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이듬해 8월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역사문제와 영토문제가 결합됐다는 것. 그는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뒤이어 나온 천황관련 발언이 일본의 국민감정을 크게 자극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정치지도자들 간의 상호불신.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와의 대립이다. 그는 정치지도자간에 역사논쟁이 일어나면, 관료들을 구속하고,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면서 국민감정을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행한 대일본 강경발언과 아베 총리의 침략 부인 발언 등을 예로 들었다.
세 번째는 중국의 대국화에 따른 전략재편. 즉 박 대통령의 외교 전략이 중국 중시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는 기고에서 "일한의 역사논쟁은 박근혜 정권의 대외정책의 전략적인 재편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하다.…박근혜 대통령의 한국은 '일미한'의 틀을 중시하는 외교전략에서 '미중한'의 틀을 중시하는 외교전략으로 시프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는 한국 사법당국의 개입도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하나는 2011년 8월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군 위안부의 배상청구권이 존재하는지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정부의 의견이 다르다면 한국 정부는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라 분쟁해결에 필요한 절차(외교경로를 통한 해결, 또는 중재위원회 회부)를 밟아야 하는데도 이를 하지 않은 '부작위'는 헌법위반이라고 한 결정이다. 또 하나는 2012년 5월 한국의 대법원이 일제강제징용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다.
이 때문에 오코노기 교수는 당초 별로 무게가 없던 '2015년 문제'라는 게 현실감을 띠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2015년 문제'란 한국은 2015년 6월에 한일협정 50주년, 8월 한국광복 70주년, 10월 북한 노동당창건 70주년을 맞게 되고, 일본은 8월 전후 70주년에 맞춰 나올 예정인 '아베 담화'와 9월의 자민당 총재선거 등이 얽혀 한일 양국 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일관계는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오코노기 전 교수의 강의는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바람직한 순서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제1의 시나리오는 양국 정상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과거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전두환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특사의 교환이나 물밑접촉 등을 통해 문제해결 방안에 합의하고, 정상회담을 열게 된다면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위안부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분석했다. 그 전제로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명언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를 걱정했다.
제2의 시나리오는 정경분리에 이어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차치하고, 강제 징용문제가 한국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확정판결이 난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한국 정부가 보상해야 할 사안'이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한국 내에 있는 일본 기업의 자산을 강제 집행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지만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강제징용자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보상)한다면 양국이 입는 타격은 줄어들고, '정경분리'를 향한 1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제3의 시나리오는 미국의 개입 또는 중재가 성공하는 경우다. 이는 이미 네덜란드에서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한미일 3자 회담을 통해 일부 실현됐다. 그런 의미에서 4월 하순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과 일본 방문이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만 미국이 너무 깊숙이 관여하면 한일 양국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고, 이는 중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또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태가 된다면,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있는 '중재' 규정에 따라 한일양국이 합의해서 미국에 '제3자 중재'를 요청한다면, 그게 최후의 기회로 부상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제4의 시나리오는 전략적인 인내와 장기적인 낙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악화가 초래하는 유형 무형의 손해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면서, 장기적인 상황변화를 기대하는 것으로 '단념'에 가까운 시나리오다. 다만 대립이 바닥을 치면, 한일간에 존재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이 보일 것이라는 게 그의 낙관론의 근거다.
오코노기 전 교수는 그러면서 지금의 악화한 한일관계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간에 한일 관계는 예전과는 다른 '제3기'의 관계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즉 경제와 산업화로 맺은 '제1기'와 역사문제로 갈등을 빚어온 '제2기'와는 다른 관계가 '제3기'라는 것. 그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이번의 갈등이 끝나면 그 윤곽이 드러나고 형태를 잡아갈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일간의 역사마찰이 장기화하면 일본에게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첫째, 일미한 안보체제의 불안정뿐만 아니라 일미관계의 견실한 토대가 불필요하게 흔들리게 된다. 둘째, 한국의 중국 경도가 촉진되고, 특히 북한문제에서 '일미한' 연대보다 '미중한' 연대가 중시될 것이다. 중국의 협력도 필요로 하는 미국이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셋째, 북한 유사시 다시 한번 금융위기 등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 대응하는 게 불안해진다. 이제는 일본이 단독으로 대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넷째, 일본인의 한국인식이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악화할지 모른다. 이는 '미래의 부채'가 될 것이다. 다섯째,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나 부인(否認)주의가 실제 이상으로 주목받아 국제적인 이미지가 장기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오코노기 전 교수는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한국에 대한 주문도 했다. 그는 "한국은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는 상대방이 있게 마련인데, 너무 과대한 주장을 계속 한다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중에는 한국이 골 포스트를 옮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즉 기존에 합의한 룰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오코노기 전 교수는 묻는다. "현재의 험악한 일한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채 2015년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코노기 마사오:1945년 생. 게이오대 졸업. 1975년부터 2011년까지 동 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교수.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동 대학 법학부장(한국의 학장), 2011년부터 3년간 규슈대 특임교수, 현재 게이오대 명예교수, 동서대 석좌교수. 동아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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