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카를로스 국왕 전격 퇴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일 03시 00분


39년 재임… 펠리페 왕세자가 승계
독재잔재 청산등 민주화 큰 공헌… 최근 가족탈세 의혹에 인기 식어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오른쪽)과 펠리페 왕세자가 2011년 12월 의회 개회식 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란히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오른쪽)과 펠리페 왕세자가 2011년 12월 의회 개회식 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란히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76)이 2일 급작스러운 퇴위를 발표했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이날 “카를로스 국왕이 퇴위 의사와 함께 왕위 계승 절차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전했다.

후계자는 국왕의 아들인 펠리페 왕세자(45)이다. 펠리페 왕세자는 지난해 말 여론조사에서 66%의 지지도를 얻어 무난히 왕위를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민주화에 지대한 역할을 한 카를로스 국왕은 2007년 스페인 한 방송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위’로 선정되는 등 재임 39년 가까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인기가 급격히 식었다.

스페인이 경제위기에 빠져 있던 2012년 아프리카 보츠와나에 코끼리 사냥 여행을 갔던 사실이 드러나 공개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엔 카를로스 가문이 스위스에 비밀 계좌를 보유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올 1월에는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가 600만 유로(약 90억 원)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이 때문에 그의 청렴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 2012년 11월 왼쪽 엉덩이에 이식한 인공관절 부위에 감염이 생긴 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 이상설에도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가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사망한 뒤 스페인 민주화의 기틀을 다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1931년 스페인에 공화제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로 망명한 알폰소 13세 국왕의 손자로 태어났다. 왕정 체제가 스페인의 이상적인 정치 형태라 생각한 프랑코 총통은 1969년 카를로스 국왕을 자신의 합법적 후계자로 공표했다.

1975년 11월 프랑코 총통 사망 이틀 뒤 국가 권력을 넘겨받은 카를로스 국왕은 즉위식에서 프랑코 독재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스페인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인들은 이 발표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는 비밀경찰을 해제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1976년 양원제 채택, 1977년 총선거 실시, 1978년 상징적 입헌군주제 도입 등 급진적 개혁조치를 잇따라 밀고 나갔다.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정당 활동도 보장했다.

그의 급진적 자유 민주주의 개혁에 반발한 극우 우익세력은 1981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 각료와 의원 350여 명을 인질로 잡고 군부 독재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이때 그는 “나를 먼저 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뒤 전투복 차림으로 TV 앞에 나가 “무력으로 민주화 과정을 방해하는 자들의 어떤 형태의 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결국 쿠데타는 18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1982년 유럽이 요구하는 지도자상으로 인정받아 샤를마뉴 대제상을, 1995년엔 유네스코 평화상을 수상했다.

카를로스 국왕은 2007년 11월 칠레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 폐회식에서 자국을 비난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향해 “입 닥쳐”라고 소리쳐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발언은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전화벨 소리가 되기도 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카를로스 국왕. 스페인#마리아노 라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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