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양국이 50년간 경제적으론 상호 의존을 늘렸지만 안보 협력 기반은 줄이고 있는 패러독스(역설)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난달 30일 동아일보 도쿄(東京) 지사에 모인 한일 전문가들은 동아일보가 게재해온 ‘한일 애증의 현장’ 시리즈 결산 좌담회에서
이같이 화두를 던지고 해법을 제시했다. 좌담회에는 이종원 일본 와세다대 한국학연구소장,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현대한국학연구센터장,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내년 6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한일 관계에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급성장과 북-일 접근 등 격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한일 관계의 현주소를 진단해 달라.
▼ 진창수 센터장=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중국이 일본 고립화 전략에 한국을 유인하고 있다. 그게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비치고 북한 제재 때 한미일 공동 전선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좋으면 일본과 중국의 대립 상황에서 한국이 중재역을 맡는 등 입지가 넓어질 수 있다. 한국의 외교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 기미야 다다시 센터장=한일은 중국의 대국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한일 단독으로는 영향력 행사가 어렵다. 한일이 협조해야 하는데 중국에 대한 시각이 너무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원래 친중(親中)이라고 재단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너무 중국 쪽으로 몰아붙이면서 한미동맹을 이간한다고 보고 있다. 북한 문제도 공유할 부분이 많다. 한일 간 불신이 해소되면 서로 이익을 공유하면서 주변국에 대응할 수 있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도 관리할 수 있다.
▼ 이종원 소장=한일 간에 서로 중요한 나라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일본 대학만큼 한국 관련 강좌가 많은 나라는 없다. 한일이 너무 가깝다 보니 감정적으로 대하는 측면도 있는데 서로의 중요성을 냉정하게 다시 봐야 한다. 한일 관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정치다. 한일 모두 양극화가 심해지고 국민 통합이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치의 내향화와 내셔널리즘이 강해지고 있다. 넓은 의미의 국가주의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일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기능적으로 협력하면 좋은데 잘 안 되고 있다.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는 지적인가.
▼ 진 센터장=동아시아는 포스트모던 시대로 넘어와 국경 없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전략가들은 국익 중심의 생각에 발이 묶여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좀 더 큰 눈으로 국제질서를 바라봐야 한다.
▼ 기미야 센터장=동아시아에 포스트모던 사회가 실현될지 의문이다. 한국은 통일, 중국은 대만,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주장하는 보통국가가 되고 싶다는 과제로 인해 여전히 근대적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 이 소장=어떻게 보면 한중일 모두 과거를 되찾겠다는 내셔널리즘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이상의 역사가 미국에 점령된 역사라는 의미에서 주권 회복의 날을 기념하는 등 내셔널리즘이 강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한중일 간에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공동체가 진전되고 있다. 여전히 기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역내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안보협력은 뒤처져 있다는 의미의 ‘아시아 패러독스’가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이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의 의미와 과제는….
▼ 기미야 센터장=국교가 정상화됐던 ‘1965년 체제’에 대한 비판이 한일 양쪽에서 나오고 있다. 당시 양국은 자신을 위해 손을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서로를 위해 잘한 것이었다. 이제는 한일 관계 대등화에 따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한일이 단독으로 할 수 없지만 협력하면서 할 수 있는 공공재를 늘려야 한다. 이는 동아시아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일이 중국을 아우르는 공통의 가치관을 만들어 지역 번영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 이 소장=솔직히 요즘 걱정이 앞선다. 1965년 이후 쌓아온 것이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내년은 일본으로 보면 종전 70년이다. 아베 총리는 종전 70년 담화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후 체제를 탈피해 일본을 되찾자는 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내년에 전승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인다는 방침이다. 한국에도 함께 하자고 접근하고 있다. 한국으로선 적지 않은 외교적 도전이다.
한일 양국 사회는 1965년 이후 많이 달라졌다. 특히 가족, 취업, 교육, 사회적 불평등 등 많은 문제는 공통의 과제이기도 하다. 양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문제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중국도 포함해 아시아 공동체를 ‘문제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정치 얘기만 하면 거리가 느껴지지만 공동체 문제로 들어가면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
▼ 진 센터장=1965년 이후 한일 관계의 토대가 달라졌다. 냉전이 끝나면서 중국이 부상했고 경제적으로 한일이 경쟁하는 시스템이 됐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전제 위에 발전해 왔던 한일 관계의 근간도 무너지고 있다. 총체적으로 한일 관계가 왜 필요한지부터 재점검해야 하는 시점이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변화된 환경에서 새로운 한일 관계를 어떻게 짜 나가야 할지, 아시아의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다.
―장기적인 한일 관계 전망은….
▼ 진 센터장=경제적 관점에서 일본은 점차 약화되고 한국은 커지면서 대등한 관계가 될 것이다. 미들 파워로서 서로 합쳐 국제적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전략적으로 상대를 바라봐야 한다. 그걸 용기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 이 소장=한일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각자 좁은 의미의 국익을 위해 달리면 동아시아에 상당한 위기가 올 수 있다. 그 전조가 이번 북-일 교섭이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할 힘을 잃으면 일거에 분열과 상호 경쟁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한일은 나란히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분열을 회피하는 게 공동의 이익이다.
▼ 기미야 센터장=현재 한일은 미국과 북한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사이인데 경쟁하면서도 협력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본다. 서로 이용할 줄 아는 전략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1965년 1만 명이던 한일 방문자 수는 지난해 5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그런 교류가 늘면서 좋아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흥미를 갖고 바라보는 관점도 늘었다. 앞으로도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도쿄=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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