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내는 “당신 아이가 아니다”라며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이를 낳은 지 2년 반 만이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거부했다. 아내는 2009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의 아이를 낳았으며 DNA 검사로 99.99%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만큼 친자관계를 무효화해 달라는 소송을 오사카(大阪) 가정법원에 제기했다.
아내는 “아이가 혈연상의 아버지와 이미 2년 반이나 동거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실제 아버지와 법률상 아버지가 다른 운명을 지게 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호소했다. 전남편은 “기른 정이 더 크다. 부자간의 연을 함부로 끊을 수 없다”고 맞섰다. 같은 내용의 소송이 같은 시기에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 가정법원에도 제기됐다. 홋카이도의 전남편은 “내 자식이라 부르고 함께 목욕하고 아빠라 불러 달라고 했던 추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읍소했다. 일본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1심과 2심에서는 두 건 모두 아내가 승소했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17일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관 5명 가운데 3명이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더라도 부자관계가 유지된다는 의견을 냈고 시라키 유(白木勇) 재판장 등 2명은 소수 의견을 냈다. 결국 시라키 재판장은 “DNA 검사 등 과학적 증명을 근거로 부자관계를 취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유는 이렇다. 일본 민법 772조는 아내가 결혼 중 임신한 아이는 남편의 아이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적출추정(嫡出推定)의 원칙’이다. 아버지를 조기에 확정해 친자관계를 안정시키는 게 아이의 이익이라는 판단에서다. 법정에서 남편의 변호사도 이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DNA 감정 결과에 근거해 언제라도 법률상의 부자관계를 취소할 수 있다면 아이의 신분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통적으로 법률적인 부자관계를 중시해왔다. 1969년 부부가 별거하는 등 부부관계가 없었던 사실이 명백한 때만 부자관계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게 유일한 예외였다.
하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 재판장이 소수의견을 낸 것도 변화의 징조다. 특히 민법 772조 2항의 ‘이혼으로부터 300일 이내에 태어난 아이는 전남편의 아이로 추정한다’는 규정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친자관계를 둘러싼 ‘혈연이냐, 법률이냐’는 논란은 앞으로도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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