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120주년/淸 북양함대 본부, 웨이하이 가보니]
“배 한척 늘리지 않고 軍紀도 해이”… 갑오전쟁 패배의 교훈 곳곳에 새겨
시모노세키 굴욕 밀랍인형도 전시… 당시 넘긴 부속도서에 센카쿠 포함
25일은 청일전쟁(중국 표현 중일갑오전쟁) 발발 120년이 되는 날이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군함 제원(濟遠), 광을(廣乙)함 등을 선전포고 없이 습격해 청나라 군사 1200여 명이 수장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은 이듬해 3월 청나라의 주력 북양함대가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에서 전멸하면서 청나라가 사실상 패배했다.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까지 벌이며 우리 민족에게 큰 피해를 줬다. 12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는 여전히 중국과 일본의 패권 다툼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국력이 커진 중국,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굴레에서 벗어나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아가는 일본이 기세 싸움을 벌이고 있어 한반도는 다시금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 반성과 교훈이 뒤섞인 류궁 섬
북양해군제독서(北洋海軍提督署·북양함대 본부)가 있었던 웨이하이 류궁(劉公) 섬. 웨이하이 부두에서 20분가량 여객선을 타고 가면 닿는다. 겉으로만 보면 관광하기 좋은 아름다운 섬이다. 21일 오전 11시 50분 배가 터미널에 들어서자 ‘전국애국주의교육 시범기지’라는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갑오전쟁박물관’과 ‘박물관 진열관’, 북양함대 마지막 제독 정여창(丁汝昌)의 관사를 개조한 ‘정여창 기념관’ 등은 중국이 갑오전쟁을 얼마나 치욕스럽게 여기는지 보여줬다. 또 이를 반성하고 교훈 삼아 해양강국 의지를 키우는 장소로도 바꿔 놓은 듯했다. 진열관 앞 ‘수사(水師·옛 해군)광장’ 변에는 ‘나라 잃은 치욕을 잊지 말고 해양강국을 이루자(勿忘國상 海洋强國)’는 글귀가 큰 화단에 꾸며져 있었다.
‘정여창 기념관’ 전시실에는 먼저 뼈아픈 반성의 글귀를 뚜렷이 새겼다.
“갑오해전 며칠 전 군기가 해이해지고 장교와 병사들은 너나없이 가족을 이동시켰으며 밤에 (군함을 이탈해) 부두에 올라가 기숙하는 자가 절반에 달했다.” “북양해군 군함은 군사훈련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여객과 화물이나 실어 나르느라 여러 항구를 오갔다.” “청나라 정부는 해군 경비를 유용해 이허위안(이和園)을 증축하면서 북양해군에는 군함 한 척, 대포 한 문 늘리지 않았다.”
진열관에도 “북양해군 창설 이래 배 한 척 아직 늘리지 않아 … 어려움이 계속될 것이 몹시 걱정된다”는 당시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글과 베이징(北京) 이허위안에 설치된 것으로 자희태후(서태후)의 60세 생일을 맞아 돌로 조각한 대규모 석조 유람선 사진을 위아래로 걸어 대비시켜 놓았다. 해군 양성기관인 ‘쿤밍호수사(水師)학당’은 만주족 학생 20명을 뽑아 서태후 유람선에 전담시켰다고도 했다. 이러한 결과로 갑오전쟁 직전 양국의 군함 규모는 청나라 4만여 t, 일본 7만여 t이었다고 한다.
● 아직도 생생한 치욕과 분노
일본 해군은 1895년 3월 17일 류궁 섬에 상륙해 북양 해군본부를 함락한 뒤 파죽지세로 산둥 성과 랴오둥(遼東) 반도 등을 장악했다. 한 달 뒤인 4월 17일에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양국 대표 5명씩이 앉아 조약에 서명하는 장면은 진열관에 밀랍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조약 11개항 중 ‘대만 및 부속 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가 있다. 부속 도서 중에는 현재 중일 간 첨예한 영토 갈등 대상인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도 포함돼 있다.
류궁 섬을 끝까지 지키던 정여창은 ‘북양해군제독 서방(書房)’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정여창 기념관’ 입구에는 그의 청동상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북양함대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웨이하이 해전이 있었던 보하이(渤海) 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여창의 현손(玄孫)인 딩샤오룽(丁小龍) 씨는 박물관에서 다른 저자가 쓴 ‘영웅 정여창’이란 책을 판매하며 사인을 해주는 일을 5년째 하고 있다. 그는 “올해 갑오전쟁 120년을 맞아 지난해에 비해 관람객이 훨씬 늘었다”고 말했다.
갑오전쟁 패배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진열관의 ‘진저우취스징(金州曲氏井)’이란 제목의 실제 인물 크기 전시물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94년 11월 6일 일본군이 진저우를 공략해 오자 취씨 집안의 부녀자와 아이 등 10명이 적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이다. 두 눈을 꼭 감고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은 채 우물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의 젊은 여성, 할머니의 소매를 부여잡고 뛰어들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표정이 매우 생생하다. 일부 관람객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30대 초반의 한 관람객 여성은 어린 아들이 “왜 우물에 뛰어들어야 해?”라고 물으니 “그러지 않았어도 적들에게 다 죽었을 거야”라고 대답하며 서둘러 다른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 ‘낙후하면 당한다’ 되새겨
진열관 마지막 전시실 중앙에는 ‘역사를 잘 기억해 경종을 오래 울리게 함으로써 해양 방어를 강하게 하고 해양 권익을 키운다(銘記歷史 警鐘長鳴 强我海防 興我海權)’는 거대한 문구가 둥근 기둥에 새겨져 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출구에는 ‘갑오전쟁 패전의 치욕의 역사는 낙후하면 당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진열관 출구 방명록에는 ‘잊지 말자’는 간단한 문구부터 분노와 다짐을 한 장 가득 적은 고등학교 교사의 글까지 다양하게 적혀 있다. ‘국치를 잊지 말고 중화 부흥을 이루자’ 같은 글이 많았으나 장쑤(江蘇) 성에서 온 37세 쑨(孫)모 씨는 ‘작은 일본을 때려잡아 댜오위다오를 되찾자’는 감정적인 글도 남겼다. 류궁 섬에서 돌아가는 선상. 여승무원이 “류궁 섬에 오셨으니 갑오전쟁의 교훈을 잊지 마시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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