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난 성 즈장둥쭈 자치현의 ‘중국인민항전승리수항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1945년 8월 21일 일본군이 즈장에서 중국에 항복하던 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첫번째 사진). 기념관 부지 중앙에 서 있는 ‘수항기념비’. 혈(血)자를 형상화했다(두번째 사진). 일본의 ‘항복 수락’ 의식 장소는 당시 모습 그대로다. 중국의 국부 쑨원 사진 앞에 중일 양국 대표의 자리와 명패가 놓여 있다(세번째 사진). 즈장=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3일은 한국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중국은 올해 2월 이날을 법정 기념일로 처음 지정했다. 중국은
이후 국가주석이 처음 참석한 가운데 ‘7·7사변 기념식’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자료를 국내외 언론에 공개하는 등 ‘항일
공정(工程)’을 벌이고 있다. 이번 ‘승리기념일’ 행사는 항일 분위기 조성의 정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유일한
‘항일전쟁승리기념관’이 있는 후난(湖南) 성 즈장둥쭈(芷江侗族) 자치현 치리차오(七里橋)를 찾았다. 》 ○ ‘일본의 항복은 즈장에서 시작되다’
‘8년에 걸친 항일 전쟁은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시작해 즈장에서 끝났다.’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후난 성 창사(長沙)에서 50인승 쌍발기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가량 날아가 도착한 즈장. 비교적 외진 이곳은 중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처음 받은 곳이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 및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연합국 대표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화민국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은 9월 3일을 경축일로 정하고 사흘간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 이어 9일 장쑤(江蘇) 성 난징(南京)에서 약 20분간 항복 서명식을 가졌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7·7사변’ 이후 벌어진 중일전쟁은 1945년 8월 21∼23일 즈장에서의 ‘수항(受降·항복 접수)’으로 끝났다. 7·7사변은 루거우차오 인근에 주둔한 일본군이 한 병사가 실종되자 “중국이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주변 지역을 점령한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중일전쟁이 촉발됐다. 일본은 이곳에서 중국 전역에 배치된 100여만 일본군의 배치도를 제출하고 무장해제 등 항복 절차에 관한 명령이 적힌 ‘비망록’을 받았다. 중국 내 일본군 항복의 세세한 내용과 난징의 항복 서명식 등이 즈장에서 결정됐다. 수항식을 전후해 중국육군총부도 난징에서 즈장으로 옮겨와 항복 절차를 총지휘했다. 난징 항복 서명식장이었던 중앙군관학교는 지금은 호텔로 바뀌어 흔적도 없어졌다. 하지만 즈장에 항일전쟁승리기념관을 세우고 1년 365일 무료 개방하는 것은 즈장이 이런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백년 치욕을 씻는 곳에 개선문 세우다’
기념관 정문을 들어서자 높이 8.5m, 폭 10.6m로 ‘중국의 개선문’이라고 불리는 하얀색 석조 ‘수항기념비(受降紀念坊)’가 우뚝 서 있다. 기념관 관리사무소 장즈융(張智勇) 주임은 “기념비에 ‘백 년의 치욕을 씻는 표지’라는 설명을 붙였듯이 즈장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뿐 아니라 100여 년 외침(外侵) 역사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념비 겉모양은 ‘혈(血)’자를 형상화해 피로 얻어낸 승리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기념비에는 ‘국가의 영광을 영원히 역사에 새긴다’ ‘적을 이겨내고 얻어낸 항복 접수를 만방에 알린다’는 등의 문구를 새겼다.
1985년 9월 3일에 문을 연 테마 전시실인 ‘중국인민항전승리수항기념관’의 1층 넓은 홀 정면 벽에는 항복을 받던 장면을 대형 그림으로 재현했다. 국부 쑨원(孫文)의 대형 사진 앞에 4명의 중국과 미국 대표가 앉고 맞은편에 일본 이마이 다케오(今井武夫) 등 4명의 대표가 앉았다. 그림 속 일본 대표는 긴장한 듯 땀을 닦고 있다.
○ ‘V’자로 덮은 항복 수락 장소
실제로 ‘항복 수락’ 의식이 있었던 장소는 기념관 맞은편에 ‘중국전구수항전례회장(中國戰區受降典禮會場)’이라는 간판과 함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건물 기둥에는 “즈장에서의 항복 접수로 일본 제국주의의 철저한 실패를 선고하다” “맹방(盟邦·연합국) 전우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즈장에서의 항복 접수는 중화민족의 반외세 침략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썼다” 등의 문구가 위아래로 쓰여 있다. 모든 문구 첫 부분에는 승리를 나타내는 ‘V’자를 새겼다.
즈장 인근 창더(常德) 시에서 왔다는 친지융(秦吉勇·42) 씨는 “항복을 받았던 장소는 처음 와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즈장 승리기념관을 듣고 배워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쓰던 의자와 책상, 쑨원의 사진 등이 그대로 있어 당시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1945년 8월 21일 오전 11시 반 즈장 공항에 도착한 이마이 등 대표단은 항복의 뜻으로 백기(白旗)를 단 차량을 타고 이곳에 오후 3시 40분쯤 도착했다. 일본 대표단 신분 확인과 일본군 병력 배치도 및 항복 절차에 관한 ‘1호 비망록’ 접수 등 첫 의식은 오후 4시부터 1시간가량 진행됐다. 일본 대표단에는 어느 때보다 길고 굴욕적으로 패전의 쓴맛을 보는 순간이었다.
즈장 항복 의식이 열린 좌우의 중국육군총부 등 3곳에는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와 장제스의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다. 당시 일본의 항복은 국민당과 장제스가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항일’에서의 국민당 역할이 재평가받고 있다. 기념관 여성 해설원 류쉬리(劉旭麗) 씨는 “항일 투쟁에 당파가 따로 없었고 국민당이나 장제스 위원장 모두 항일전쟁을 통해 승리를 이룬 같은 중국인”이라고 말했다. ○ 왜 즈장인가
즈장은 예부터 ‘전검문호(滇黔門戶·윈난 성과 구이저우 성으로 통하는 문) 전초인후(全楚咽喉·초나라 전체로 통하는 목구멍)’라는 말이 있듯 중국 서남부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장제스가 1936년부터 이곳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항식이 열릴 당시 즈장 공항은 중국에서 상하이(上海) 훙차오(虹橋) 공항 다음으로 커 많은 대표단이 참가할 수 있는 이곳으로 결정됐다.
즈장에서 일본과 중국이 1945년 4월 9일부터 6월 9일까지 ‘최후의 전면전’을 벌인 것도 이곳이 항복 접수 장소로 결정된 이유 중 하나다. ‘샹시(湘西)회전’ 또는 ‘즈장보위전’으로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일본은 1만5676명, 중국은 1만2483명이 숨졌다.
류쉬리 씨는 “관람객이 많을 때는 1시간짜리 해설을 하루에 6, 7회나 한다. 지난 한 해 100만 명가량이 찾아왔는데 올해는 벌써 80만 명이 넘었다”고 말했다.
▼ 12월 13일 ‘난징학살 국가애도일’ 첫 지정 ▼
中 정부-언론 항일분위기 띄우기
중국은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12월 13일을 ‘난징대도살 희생자 국가애도일’로 처음 지정하는 등 항일 분위기 고조에 ‘올인’하고 있다.
국가당안국은 지난달 25일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피맺힌 분투-사료 속의 중국의 항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에 대항한 주요 전투 내용과 사진 영상 등을 공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루거우차오 사건(1937년 7월 7일)으로 30일간 하루 한 건씩 공개된다.
국가문서 보존 및 관리를 담당하는 국가당안국은 8월 15일부터는 ‘위대한 승리-중국이 항복을 수락한 당안 24편’을 공개했으며 7월 3일부터 8월 16일까지는 ‘일제 전범 서면 자백서’ 45편을 전범 사진과 함께 하루에 한 편씩 공개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인 8월 15일 관영 런민(人民)일보는 “일본은 과거 침략 역사에 책임을 져야 비로소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며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7·7사변 77주년을 맞아 7월 7일 베이징(北京) 펑타이(豊臺) 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일본 관동군사령부가 있었던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의 당안관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하는 자료 등을 올해 잇따라 공개했다. 중국 정부는 6월에는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올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주최하는 중국은 3일 승전기념 행사 이후에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 분위기 조성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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