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속고 있었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 사후 39년 만에 ‘악의 평범성’ 논쟁이 미국에서 재점화되고 있다.
논쟁에 불을 댕긴 것은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목을 가져온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의 저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서평에서 이달 초 영어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리는 아렌트의 핵심 이론을 정면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악의 평범성은 ‘아무리 평범한 시민이라도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비판 없이 집단의 광기에 휩쓸리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61년 4∼12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8개월간 참관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친절하고 선량하며 근면한 관료”라고 전제한 뒤 “무비판적으로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생각의 무능’이 그를 유대인 학살의 주범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슈탕네트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아이히만은 철저히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속마음을 감춘 채 어수룩한 관료의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슈탕네트는 나치 패전 뒤 10년간 신분을 속이며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아이히만이 쓴 메모와 글 수만 건을 분석했다.
이 책을 계기로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거나 자신의 이론을 펴기 위해 아이히만 사례를 일부러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다시 나오고 있다. 데버러 립스태트 에모리대 교수는 NYT와 인터뷰에서 “아이히만에 관련된 기존 저서들이 아렌트 이론에 흠집을 냈다면 이 책은 산산조각을 내버렸다”고 평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도 이 책을 인용해 “아이히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슈탕네트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의 지적이 현대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세일라 벤하비브 예일대 교수는 “아렌트의 주장은 악한 행동을 절대악과 부패, 타락에 기인한 것으로 보던 당시 서구 학계의 인식에 반기를 든 것”이라며 “아이히만의 광신적 반유대주의가 드러났다고 해서 아렌트의 이런 업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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