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메구미 조사가 남긴 것]
日정부와 협력조사 뒤 진실 밝힌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日정부 대책본부가 직접 질문서 작성… 국민 세금으로 진실 조사해놓고 부정
사람 생명을 정치적 이용하면 안돼”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14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납북자가족모임 사무실에서 “‘남북이 한국 납북자들의 전면적 생사 확인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하루빨리 나오도록 박근혜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무실 벽은 ‘송환 생사 확인’이라는
글과 함께 수많은 납북자들의 현재 상황과 각종 소식들로 채워져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정부가 인정한 6·25전쟁 이후 납북자는 517명이다. 그중 탈북에 성공한 사람은 모두 9명. 8명은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62)가 2000년 이후 북한에서 탈출시켰다. 나머지 1명은 스스로 탈북했다. 정부가 공식 귀환시킨 납북자는 한 명도 없다. 통일부 장관들을 상대로 호통을 마다하지 않는 최 대표를 보면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뜬 초강성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그런 그가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엄마!”라고 고 김애란 씨(2005년 사망)를 부르며 한참을 울었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가방 속 붉은 주머니엔 화장한 ‘엄마’의 유해 일부가 있다. 지칠 때마다 주머니를 꺼낸다. 김 씨는 최 대표가 21년간 납북자 구출에 온몸을 던지게 한 버팀목이다.
“납북자를 구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어떻게든 납북된 아버지의 뼈라도 구해 오라’는 엄마의 한(恨) 어린 ‘지시’에서 시작됐어요. ‘아부지’가 납북된 뒤 엄마가 생선장사로 모은 돈을 쏟아부었죠. 북한 내부 정보원들이 늘어나면서 납북자 국군포로와 관련된 정보가 내게 모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대북첩보 임무를 맡았던 ‘8240유격백마부대(켈로부대)’ 출신 고 최원모 씨. 1967년 납북돼 북한에 의해 처형됐다. 올해 6월 부친의 위패가 대한민국 호국의 성지인 국립현충원에 봉안됐다. 김애란 씨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1월 7일자 A1면 보도.최 대표가 손때 가득한 납북자 명단을 보여줬다. 1997년 한국 정보당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낱장 여러 개이던 이 명단을 김애란 씨가 과거에 직접 바느질로 다 꿰맸다고 한다. 납북자를 구출할 때마다 최 대표는 이 명단을 보여준다. “명단 순서대로 내려가며 ‘이 사람 아냐’고 묻습니다. 우리 아부지 순서가 될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떨립니다.”
초강성 이미지 내면에는 분단의 질곡으로 얼룩진 가족의 슬픔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엄마, 아부지’에겐 언제나 아버지가 납북됐던 그해, 열다섯 살 아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최 대표는 2004년부터 일본 납북자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橫田惠)와 관련된 정보를 접하게 됐다. 납북자 문제를 오래 다루다 보니 관련 정보가 그에게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15일은 메구미가 1977년 11월 15일 납치된 지 37년이 되는 날이다.
▼ “납북자 517명 외면하는 한국 정부, 너무해” ▼
최성용 대표 인터뷰
―메구미의 남편이 납북된 한국인 학생이라는 얘기를 처음 알렸는데….
“2004년 북한 관계자로부터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은 한국에서 끌려온 학생’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직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 당시 일본 외무상,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현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한일 정부가 공동으로 조사해 달라’는 청원서를 속달로 보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 총리가 관방장관이었던 때다.”
―어떻게 됐나.
“한국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일본 정부는 1주일 만에 응답했다. 일본 외무성 고위관계자와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일본 정부는 메구미 딸의 DNA를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와 함께 한국에서 납북된 학생 5명의 남쪽 가족 DNA를 구했다. 혹시라도 외교 문제가 될까 싶어 한국 외교부에 전화했더니 ‘대표님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답만 돌아왔다. 통일부는 가관이었다. ‘조사 자체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일본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영남 씨가 메구미의 남편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후 일본 정부의 납치문제담당 부서와 계속 협력해 왔다.” ―이번 메구미 사망 조사에 대해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등 반응이 묘한데….
“메구미 사망 당시 북한 병원에 근무했던 관계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대책본부가 조사를 결정해 질문서를 직접 만들었다. 일본 국민 세금으로 납치 문제의 진실을 조사한 공무원을 부정하는 정부가 어디 있나.”
―일본 정부가 어떻게 해야 순리에 맞는 것일까.
“메구미의 죽음이 북한 주장과 달리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며 북한이 시신을 유기했다는 인권 유린의 증거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춰 진상조사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 정부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인가.
“북한의 송일호 북-일 국교정상화교섭담당 대사는 협상 때마다 일본 기자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며 공공연히 ‘2002년에 일본에 통보한 공식 납북자에 대한 보고(메구미 등 사망 8명)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만났던 일본의 납치문제담당 고위 공무원들도 메구미의 사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했다. 사람의 생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어떤가.
“정부가 납북자 생사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부에 알리는 실정이다. 상봉은 기회 몇 번 없는 이산가족 상봉 때 비공개로 납북자 몇 명 끼여서 만나는 게 전부다. 북한은 대남 선전에 적합하지 않은 납북자를 모두 ‘생사확인 불가’라고 통보한다. 그간 통일부 장관들을 만나 ‘생사확인 불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한 답만 들었다. 정부가 역할을 못하다 보니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처럼 극우적 일본 인사와 납북자 운동을 이유로 손을 잡고, 정부는 이런 한국 단체에 지원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지난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감에 증인으로 나와 호통을 쳤는데….
“김정일은 일본에 납북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한국 정부는 납북자에 대한 인정조차 못 얻어냈다. 범죄를 쉽게 시인하는 범죄자가 어디 있나. 노력을 해야지. 국회의원들에게 ‘517명이 눈 뜨고 북한에 납치당했는데 전담부서 하나 없다. 그러고도 외국 나가 선진국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느냐, 창피하지 않느냐’고 했다. 조국을 위해 죽은 사람도 외면한다. 아버지가 있었던 켈로부대에서 552명이 산화했지만 국회는 예우 법안 통과마저 방치하고 있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박근혜 정부가 헌법 가치인 자국민 보호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박 대통령이 납북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납북자 가족들을 만나서 위로했다.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 대표는 1977년 납북된 이민교(납북 당시 18세) 씨 얘기를 꺼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을 그리며 집 뒷산 나무를 껴안고 운다고 했다. 매일 아들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고 했다. 하도 껴안다 보니 나무가 닳았다고 했다. “북한의 범죄를 용서해줄 테니 만나게만 해달라는 게 이 씨 어머니 소원이다. 그 소원 못 들어주면…, 나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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