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에 희생된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47)는 잇단 테러위협 속에서 2012년 다시 무함마드 누드풍자화를 내보낸 뒤 텔 켈 잡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아이도 없고 아내도 없다. 차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다. 약간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하지만 그에겐 ‘숨겨진 아내’가 있었다. ‘샤르브’란 필명으로 더 유명한 샤르보니에가 숨진 뒤 프랑스 TV TF1과 BFMTV 출연해 “내가 여기에 전직 장관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여성으로 나온 것”이라고 밝힌 자네트 부그라 씨(42)다.
그녀는 샤르브의 연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뜻밖의 여인이었다. 공산주의자였던 샤르보니에는 우파였던 사르코지 정부(2007~12년)를 맹비판해왔다. 변호사 출신의 부그라 씨는 바로 그 사르코지 정부에서 여성장관을 지냈다. 사르코지 정부에선 교육·청소년·시민사회부가 있었는데 부그라 씨는 청소년·시민사회 담당 국무장관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사르코지의 대중연합운동(UMP) 당원이다. 뿐만 아니라 알제리 이민자 가정의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대부분 무슬림이다.
부그라 전 장관은 7일 테러소식이 전해지자 샤르보니에게 3차례나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묵묵부답이자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오열을 터뜨렸다. 이를 본 현장의 기자들이 샤를리 에브도와 관계를 묻자 둘 사이의 관계를 공개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떻게 만났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동거한지 1년가량 된다고 밝혔다. 부그라 전 장관은 3살짜리 입양한 딸이 있다.
부그라 전 장관은 “그를 사랑하기 전부터 그를 숭배해왔고 내가 알던 대로 모든 통념에 도전하는 사람이었기에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샤르보니에가 제2의 테오 반 고흐가 될까 우려돼 프랑스 밖으로 피신하라고 호소했으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서서 죽기를 택했다고 말했다. 테오 반 고흐는 무슬림풍자 만화를 썼다가 2004년 살해된 네덜란드 만화가다. 부그라 전 장관은 “그는 절대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죽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는 두려움 없이 살았지만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부그라 전 장관은 무신론자로서 이슬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오작교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는 세속주의의 옹호자였고 볼테르 정신의 계승자였다. 사실 그야말로 프랑스 공화국이 잊고 있던 이상의 진정한 실현자”라면 “내가 대통령이라면 샤를리 에도브 희생자들에게 팡테옹에 묻어주겠다”고 말했다. 팡테옹은 프랑스가 배출한 위인을 모시는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부그라 전 장관의 이런 언행은 정파를 초월한 사랑으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샤르보니에의 유족은 부그라 전 장관을 유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공식 거부했다. 정치적 노선 차이 때문이었을까 샤르보니에의 동생 로랑은 10일 “부그라 전 장관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스스로를 드러내지 말기 바란다”며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유족성명을 발표했다.
부그라 전 장관은 “유족의 뜻을 받아들여 내 존재를 지우고 샤르보니에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겠다. 그 결정에 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나는 멍들고 패배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은 내 사랑과 마지막 만남의 순간에 나를 제외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를 두 번 죽였다”고 슬픔과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여러 지인의 증언도 나왔다. 두 사람과 부그라 전 장관의 딸이 다정하게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공개됐다. 부그라 전 장관은 “우리관계를 언론에 공표하진 않았지만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머니를 만났고 내 딸은 그를 ‘아빠’로 부른다”며 유족의 최종통보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샤르보니에는 2009년부터 샤를리 에도브의 편집장을 맡아 2011년 11월 ‘샤리아(이슬람 율법) 에브도’라는 특별판 발행과 2012년 9월 무함마드의 누드풍자화 게재를 주도하며 이슬람 비판을 주도해와 테러범인 쿠아시 형제의 첫 번째 목표가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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