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뜨는 정치지도자들]<7>“전방위 국가개조” 외치는 렌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9일 03시 00분


‘위험한 남자’ 앞에 ‘데몰리션 맨’ 있다

지금 이탈리아는 올해 갓 마흔이 되는 젊은 총리의 행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 그의 이름은 마테오 렌치(40). ‘파괴자’라는 뜻의 ‘데몰리션 맨(demolition man)’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중도 좌파를 표방하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국가 개조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유럽 내 역대 최연소 총리에 취임한 그는 60, 70대 ‘노(老)정객’들이 지배해온 이탈리아 정치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럭셔리 관용차들을 인터넷 경매로 팔아치웠고, 내각의 절반을 여성에게 맡겼다. 양복 대신 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 그는 “휴대전화 속에 국가행정의 미래를 담겠다”며 모든 민원 시스템을 휴대전화 앱으로 처리하는 행정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파괴자’라는 별명을 안긴 것은 나라 전체를 뜯어고치겠다는 동시다발 개혁안. 우선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였다. 렌치 총리는 지난해 8월 315명에 달하는 상원의원 수를 100명이나 줄이는 40개항의 정치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역사적인 일을 단행했다. 상당수 여야 의원이 거세게 반대하며 표결까지 불참하는 진통 끝에 통과시킨 개혁안이다. 법안은 앞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최종 통과되어야 하지만 기존 어떤 정치인도 손대지 못했던 고질적인 국회의 비효율에 칼을 들이댔다는 점에서 여론의 지지는 높다.

렌치 총리가 또 승부수를 던진 분야는 노동 개혁. 이탈리아는 1970년대 도입된 노동법에 따라 15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주는 ‘정당한 사유(just cause)’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 한번 정규직으로 취업하면 평생 고용을 보장받는 시스템이라 ‘시스테마토(Sistemato·시스템 안에서 안착한 사람)’라는 말까지 별도로 있을 정도이다. 2000년대 들어 개혁 성향의 정치인들이 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무산돼 개혁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개혁과제로 꼽혔다.

이 노동 개혁이 마침내 렌치 총리 재임 중 이뤄지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일고 있다. 그는 ‘더 잡 액트(The Job Act·일자리 법안)’라는 이름의 법안을 통해 기업이 고용과 해고를 쉽게 하도록 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대폭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법안 이름을 영어로 지은 것도 유연성과 혁신을 강조하는 미국 노동시장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노조로부터 달걀 세례까지 받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렌치 총리는 마침내 지난해 12월 3일 법안이 상원 문턱을 넘도록 하는 데 성공해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2015년 새해 그의 정치역정은 가시밭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달 14일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89)이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취임 11개월 만에 최대의 정치적 시험대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탈리아의 최대 관심은 렌치 총리가 추천한 대통령이 29일로 예정된 의회에서 승인을 얻을지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대통령이 실권 없는 의전적 성격이 강한 자리이긴 하나 지금은 유로존 재정 위기 같은 국가 위기 상황이라 대통령이 국회 해산, 새 정부 구성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점이어서 중요한 자리이다.

더구나 각종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렌치 총리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힘을 받는 상황이다. 현재 여러 사람이 거론되고 있으나 총리가 제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은 상하원 모두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현재 총리가 이끄는 중도좌파 민주당의 의석조차 과반에 못 미친다. 설상가상으로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 정당인 시리자가 집권한 것도 렌치 총리에겐 악재 중의 악재다. 민주당 내 좌파 계열들이 그리스 지지를 표방하면서 공격의 화살을 총리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렌치 총리는 집권 민주당 내의 단결을 위해 이들을 껴안는 한편으로 이들이 반대하는 국가 개조도 해내야 하는 위기에 몰려 있다.

좀처럼 경기가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도 고민이다.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이탈리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국내총생산(GDP) 경제 규모가 9% 축소됐고, 제조업 생산량도 25%나 줄었다.

실업률은 13.4%에 이르고, 청년실업률은 43.6%가 넘는다. 번번이 개혁의 발목을 잡는 정치권 때문에 개혁의 속도가 늦어지자 이탈리아 개혁을 바라보는 유로존의 시각도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 정치가 던진 마지막 ‘희망의 주사위’로 출발한 렌치 총리. 그의 정치인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이탈리아는 새롭게 거듭나느냐, 아니면 제2의 그리스가 될 것이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전방위#국가개조#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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