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어디로? ‘뼛속까지 좌파’ 37세 ‘옴므파탈’ 정치인 돌풍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3일 17시 13분


올해 37세의 ‘말총머리’ 좌파 정치인이 스페인 정치권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스페인의 신생 좌파정당 ‘포데모스’의 당수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그 주인공이다.

기성정치권에 환멸을 느낀 스페인 유권자들은 ‘긴축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옴므 파탈’(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남성) 정치인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가 이끄는 포데모스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집권 국민당과 제1야당인 사회노동당을 제치고 지지율 27%로 1위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올해 5월 지방선거와 12월 총선에서 승리가 예상되고 있다.

이글레시아스의 트레이드 마크는 뒤로 질끈 묶은 말총머리와 턱수염, 그리고 빨간색 넥타이. 그의 외모는 어떤 말보다도 선명한 정치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장 양복을 입고 앞 뒷머리를 짧게 자른 ‘라 카스타’(엘리트)로 불리는 스페인 주류 정치권에 도전하겠다는 ‘반항’의 상징이다. 캐나다 출신 가수 레너드 코헨의 노래 ‘우리는 먼저 맨해튼을 친다. 다음에 (미국을 추종하는) 베를린을 접수한다’가 울려 퍼지는 그의 집회는 마치 록스타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지지자들 수천 명이 추운 날씨에도 집회장 밖에서 소리치며 열광할 정도다.

‘포데모스’는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는 뜻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008년 대선 구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난달 31일 포데모스 주도 하에 마드리드에서 열린 반긴축시위에는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글레시아스는 “이제는 스페인이 변화할 때”라며 총선에서 승리하면 1조 유로(약 1240조 원) 규모의 스페인 부채를 재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요시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최근 일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 급진좌파의 부상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주창해 온 혹독한 긴축정책이 낳은 예기치 않은 괴물”이라고 지적했다. 이글레시아스는 지난달 그리스의 총선 당시 아테네를 찾아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불리는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당수 알렉시스 치프라스(40)와 손을 잡고 유럽 좌파의 연대를 과시했다. 그는 이윤을 내는 기업의 노동자 해고금지, 최저임금 인상, 부유세 신설, 기업 법인세 인상, 에너지 기업과 병원, 교육부문의 국유화 등의 공약을 내걸어 긴축과 생활고에 지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이글레시아스는 1978년 역사학과 교수인 아버지와 스페인 노조연맹(CCOO)의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부모님이 19세기의 ‘스페인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4살 중학생 시절부터 스페인공산당에서 청년 당원으로 활동하고 ‘반(反) 세계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뼛속 깊은’ 좌파 정치인이다. 그는 2008년 콤플루텐세대학에서 ‘국경이 사라진 시대의 집단행동’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위스의 유럽대학원(EGS)에서 영화에 대한 정치적 분석 연구로 커뮤니케이션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스페인 명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2002년 이후 학술잡지에 3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TV토론 프로그램에서 해박한 지식과 달변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글레시아스는 2011년 5월 긴축정책과 불평등 격차가 커지는 데 대한 대중적인 항의운동인 ‘분노하라’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시위 지도부에 참여한 교수들과 함께 지난해 1월 ‘포데모스’를 창당해 분노한 대중들을 정치세력화 했다. 포데모스는 창당 4개월만인 지난해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8%의 득표율로 일약 제3당으로 떠올랐다.

포데모스의 부상은 스페인에서 1975년 프랑코 독재가 몰락 한 이후로 40년 동안 지속돼 온 보수당인 국민당(PP)과 중도좌파 사회당이 지배해 온 양당 체제의 붕괴를 뜻한다. 스페인 유권자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라며 뒷짐 진 기성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글레시아스는 “다수 대중이 정치권력을 갖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의 권리도, 지갑도 훔쳐갈 것”이라며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로 유권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이글레시아스가 이끄는 포데모스의 지지율이 높아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복지확대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마련 방안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해고금지 정책에 대해서는 스페인 기업들의 경쟁력이 하락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포데모스가 시리자의 전술을 흉내 내는 것은 ‘양날의 칼’”이라고 지적했다. 신생 그리스 정부가 그리스를 경제 회복으로 이끈다면 포데모스에게도 좋은 미래가 있겠지만, 급진좌파 노선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급속히 빠져나가고 유로존 퇴출로 이어진다면 포데모스의 미래도 어두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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